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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르페디엠 Jul 22. 2022

진단 사실을 친구에게 털어놓다.

혼자가 아니야

병원에서 전화를 받고 나서, 주화입마에 빠졌다. 아내는 임신 초기 입덧과 코로나 증상이 겹쳐 걷기조차 힘들어하는 컨디션이었고 나 또한 코로나 증상과 여독으로 뭐랄까 그냥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는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컨디션이 조금 나아지니, 밀려있는 집안일과 재택근무, 그리고 암이라는(80% 이상) 사실에 관한 중압감이 드디어 내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누구라도 붙잡고 하소연을 하거나, 한없이 약한 모습으로 무조건적으로 기대고 싶었다.


답답한 마음에 자초지종을 ㅂㄹ친구들이 있는 카톡방에 툭 던지자니 그건 마치 비보 공지처럼 느껴져서 싫었다.(내 고향 친구들은 총 10명이다) 2년 전 어머니께서 담낭암으로 소천하셨으므로 아버지께 말씀드리기에도 신경이 쓰여 혼자 끙끙 앓고 있었다.


그러기를 며칠, 아무래도 안 되겠거니 옆 동에 사는 친구 양에게 전화했다. 이 녀석은 내 가장 친한 친구기도 하고, 지난번 연대 세브란스병원 진찰 시 불러내어 점심을 먹은 적도 있어서 대충 얘기해도 알아먹을 것 같았다.(양은 현재 연대 석사과정 중이다.)


전화를 받은 양은 대학원 친구들과 엠티를 다녀왔다고 했다. 삼십 대 중반인데 이박삼일 간의 엠티 후에도 멀쩡한 체력 맨 내 친구. 내가 나오라고 하자 씻으려고 나체 상태라고 했다. 이에 나는 나체로 나오라고 했다. 뇌를 거치지 않고 그냥 막 말해버려도 받아주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여하튼 잠깐의 실랑이 후, 씻은 후 아파트 단지 내 정원에서 만나는 것으로 합의했다. 이렇게 실없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양을 기다리는 동안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나는 간단한 안부를 여쭌 후 갑상선 검사 결과 암일 가능성이 높아 병원에 또다시 가봐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친아버지가 맞을까 싶을 만큼(?) 아버지는 별 일 아니란 듯이 괜찮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아버지의 반응에 당황스러웠고 조금 서운한 감정이 들기도 했지만 결론적으로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라이트하게 반응하셨기 때문에 내가 걱정을 덜 수 있었던 것 같다.


회사에 이 일을 어찌 전해야 할지에 관해서도 조언을 구했는데, 개인 건강인만큼 있는 대로 말하는 편이 낫겠다고 말씀하셨다. 오랜 기간 회사생활을 하신 아버지는 내가 종종 회사생활을 하며 고민이 있을 때에 멘토가 되어 주신다. 아빠가 말해주면 나는 의문을 갖지 않고 그대로 실행하곤 한다. 결과는 언제나 옳았다. 지금 글을 쓰며 생각해보니 아버지의 말씀에 대한 신뢰가 깊은 것 같다.


양은 드디어 내려왔다. 얼굴을 마주 보고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었다.(출가 후 내 가족은 아내뿐이라고 생각한다. 나쁜 뜻은 아니고 내 아내가 언제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는 의견) 내가 암일지도 모른다고 얘기하자 양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그래?' 하고 반응했다. 드라마틱한 반응은 내 스트레스를 키울 뿐이므로 덤덤하게 들어달라고 요청했고 이내 인상을 편 친구에게 나는 담담한 태도로 상황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양은 내게 그래도 될 놈은 되나 보다고 했다. 오랜만에 어떻게 갑상선 초음파 검진을 다시 받을 생각을 했으며 동네 진찰 후에 대학병원을 다시 찾아간 것도 잘했다는 거였다. 나도 그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제 3자가 다시 한번 그리 말해주니 그래, 나는 역시나 잘했구나.. 큰 위로가 되었다. 또한 친구에게 털어놓고 나니 이는 이제 더 이상 나 혼자만의 고민이 아니게 되었다. 지원군이 더 많아진 것이다!


나의 이야기 후에는 양의 근황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사귀고 있는 여자 친구와 진지하게 미래를 고민하고 있었다. 둘은 회사 동기로 만났는데 8년간 알고 지내던, 동기 중에서도 꽤 친하던 사이였다. 사실 나는 수년 전부터 양에게 동기랑 잘해보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를 많이 했었는데 모쏠이었던 양은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었다. 그런데 최근 2년간 압축해서 여러 번의 연애 경험을 쌓은 양은 드디어! 지금의 여자 친구를 진지하고도 매력 있는 여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던 것이었다. 오래 본 만큼 서로의 진가를 알아보고 그만큼 서로에게 집중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또 양은 올해부터 회사 양성 과정으로 석사과정 중인데, 여자 친구는 퇴사 후 수의대로 편입하여 공부 중이라는 점도 참 시기가 잘 맞았다 싶다. 시험기간에는 서로 힘이 될 수도 있고 또 각자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환경이 둘의 관계에 얼마나 긍정적으로 작용할지, 모름지기 연애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이 둘의 상황에 가장 부러운 점은 방학이 있다는 것이었다. 양은 방학 기간에도 당연히 월급을 받을 테고, 여유롭게 여행도 갈 수 있고 평소에 생각만 하던 일들을 할 수 있을 테니. 30대에 회사를 퇴직하지 않으면서 이런 것들을 해 볼 기회를 얻는다는 건 귀하고 좋은 일이다. 비록 내 일은 아니지만 내 친구에게 이런 소중한 기회가 주어져서 좋다. 여하튼 친구와 근황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도 내 삶의 일부로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제 상세 설명을 들으러 곧 병원에 다시 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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