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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르페디엠 Feb 21. 2023

서머싯 몸 - 인간의 굴레에서 1(민음사)

달과 6펜스를 읽고 서머싯이 너무 좋아서 선택한 책

백 년 전 이야기 속에서도 연인이나 친구 혹은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감정이나 상황이 요즘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도 참 재밌다. 주인공이 처한 상황과 섬세한 감정선을 '서머싯 몸'의 소설 '인간의 굴레에서-1권'에서는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


주인공 필립은 어릴 적 부모를 병으로 여의고 영국 어느 시골 지역의 관할 사제인 백부의 집에서 자란다. 필립은 선천적으로 몸이 불편하여 절룩거리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입학 후 동급생들은 이에 대해 놀려댔고 자존심 강한 필립은 모욕감을 속으로 꾹 참으며 학교 생활을 이어나간다. 뿐만 아니라 책 읽는 습관 때문에라도 그는 홀로 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일까, 필립은 학교에서 썩 좋은 성적을 척척 받아내었고 옥스퍼드 진학을 앞둔, 촉망받는 학생으로 성장한다.


그러던 중 같은 반 인싸 '로우즈'가 돌연 필립에게 관심을 나타내면서 그의 학교생활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어린 소년들의 우정이 대개 그렇듯 그 둘은 급격히 가까워지게 되고 필립은 비로소 누군가와 함께하는 환희를 느끼게 된다. 로우즈가 필립을 좋아하니 기존에는 놀려댈 뿐이었던 학우들이 필립을 친구로서 인정하고 또 추켜세워주기도 했다.


필립은 방학이 시작되며 친구와 헤어질 수밖에 없어서 매우 슬펐다. 방학이 시작된 후에는 개학 시점에 기차시간을 맞춰서 만나기로 한 로우즈와의 약속만 오직 기다릴 뿐이었다.


그런데 아뿔싸, 개학 당일 아무리 역에서 기다려도 로우즈는 약속한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하염없이 기다리다 뒤늦게 학교에 도착한 필립은 오히려 먼저 학교에 도착해서 다른 친구들이랑 놀고 있는 로우즈를 만났다. 기차역에서 필립을 봤다며 왜 이렇게 학교에 늦게 도착했냐는 당치도 않은 로우즈의 질문이 야속했지만, 자존심이 상해 필립은 대충 거짓말로 둘러대고 말았다. 또 밝게 자기를 맞이해 주는 친구의 얼굴을 마주하니 그런 감정이 무슨 소용인가 싶어 없던 일처럼 넘어갔다.


그러나 언제나 많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일상을 지내던 로우즈와 그가 전부였던 외톨이 필립은 결국 오래 함께할 수 있는 운명은 아니었다. 필립에게는 서운한 일들이 쌓여갔고, 배신감을 느꼈다. 둘은 결국 등을 지게 되었다.


백부는 필립이 옥스퍼드에서 수학하고(심지어 장학금까지 약속되어 있었다) 성직자가 되기를 바랐지만 필립은 학교에서 무시받던 생활의 연장선처럼 느껴져서 대학에 가기 싫었고, 더 넓은 세상이 궁금했던지라 미래에 대한 고민을 위해 하이델베르크로 떠나게 된다.


독일에서는 대학 교수와 그 딸들, 그리고 중국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하숙집에서 생활했는데, 주위에 사제들과 영국에서 나고 자란 고지식한 사람들 사이에만 둘러싸여 있던 필립에게 이 경험은 이 세상에는 다양한 인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즉,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 앞으로의 인생에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게 되는 계기가 된다.


독일 생활이 끝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 후, 필립이 짧게나마 경험했던 연애의 감정도 아주 흥미롭다. 적당한 관심이 있던 (본인 마음에 썩 들지 않는)사람에게 호기심으로 추파를 던졌으나, 그 사람이 필립을 진정 사모하게 되면서 필립이 느끼는 갑갑하고도 부담스러운 감정에 대한 묘사는 마치 세밀화처럼 상세했다. 몇 개월 뒤, 생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던 필립은 이번에는 회계사가 되기로 하고 런던으로 떠나면서 그 관계는 자연스레 정리된다.


회계사로  일하면 수입도 보장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명함 내밀기에도 나쁘지 않았지만, 자기의 길이 아니라고 느꼈던 그는 일 년의 생활 끝에 결국 마음의 소리를 따라간다. 즉, 화가가 되기로 마음을 먹고 파리로 떠나게 된다. 1900년대 초에 쓰인 이 소설 속에서 타이틀을 중시하고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며 은근히 남보다 자신이 더 우월하다고 드러내는 장면들을 보면, 남에게 비치는 체면을 중시하는 일종의 속물적 문화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결국 인생살이는 시대를 막론하고 해외나 국내나 비슷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리에서의 생활은 쉽지만은 않았다. 경제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싸구려 음식으로 배를 채우기 일쑤였으며 잘 알지 못하는 불어를 배우고 쓰느라 애를 먹었다. 만학도로서의 늦은 시작으로 그림 실력을 키우는 데도 남들보다 몇 배 더 열심히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립은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파리 생활에 조금씩 적응해 나갔다.


이 시절, 필립은 화실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괴팍하고 이상하다는 평을 받는 프라이스 양의 호감을 사게 된다. 패니 프라이스는 찢어지게 가난했고 높은 자격지심에 마음에 여유가 별로 없는 인물이다. 화실의 선생님은 이제 막 그림을 시작한 필립을 도우라고 패니를 옆자리로 붙여주었는데, 이로 인해 조금씩 친해지게 되었다. 패니는 지난 몇 년간 그림 그리기에 누구보다 열심이었지만 미학적 재능은 눈곱만큼도 없어서 그림 실력은 초등학생 만도 못했다. 다만, 열심히 공부한 만큼 이론적 지식은 잘 알고 또 남에게 조언하는 것을 좋아했으므로 필립은 초심자에게 필요한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다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패니가 필립을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면서 자신의 조언이 아닌 다른 친구들의 조언을 받는 필립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이는 필립이 짜증을 느끼는 부분이 되었다. 마치 학창 시절 로우즈에게 필립이 느꼈던 감정을 패니가 느꼈던 것이리라. 필립은 이때 로우즈의 감정을 생각해 볼 수 있었을까?


패니는 일종의 자아도취에 빠져 있어 자신의 실력에 대해 객관적으로 알 수가 없었고, 모두가 본인의 천재성을 몰라보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그랬기 때문에 필립은 패니와 함께할 때, 그녀가 자신의 작품이나 생각, 관념이 훌륭하다고 말할 때마다 (그녀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매번 적절한 단어를 머릿속에서 골라가며 진심을 숨겼다. 끼니조차 해결하기 어려울 만큼 가난했기에 그녀는 사람들과 어울릴 돈이 없었고, 자존심 또한 강해서 심한 외로움에도 불구하고 남들과 함께 할 수 없었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만 지내던 그녀에게 필립의 사려 깊은 말과 행동은 따뜻한 관심으로 느껴졌으며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때까지 필립은 매번 수동적인 연애를 해왔다. 남들과 다른 신체적 특징으로 주눅 들었던 경험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부모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마음속으로만 낭만적인 사랑을 그려볼 뿐 자기가 실제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차마 하지 못했다. 버림받을지도(상처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압도되어 그랬던 것 같다. 나를 좋아해 주는 이성만을 가까이했으므로 조금씩 피하다가 결국에는 거북한 감정으로 끝이 나버렸다. 이번에도 좋아하지 않는 패니로부터의 애정 갈구에 필립은 도저히 보답할 수가 없었고 불쾌한 감정마저 들었다. 남녀 관계에서 한 사람만의 일방적 관심은 상대방에게 더 큰 무관심을 초래하게 되는 불편한 진실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필립과 조금씩 멀어진 패니 프라이스는 그림 실력에 관해서 몇 년 동안이나 자신을 가르치던 프와네 선생에게 처절한 혹평을 듣게 되고, 경제적으로도 너무 어려워 며칠 동안이나 굶주리게 되는 등 극한의 상황에 내몰리면서 자살한다.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 패니보다 성실하게 노력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을 필립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헛된 노력이 허망하기도 했고 무척이나 가슴 아팠다. 이 비극적 사건을 통해 필립은 자신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게 되면서, 본인도 이류 화가 이상이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필립은 두려움에 압도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어영부영 세월을 보내기보다는 담대한 마음으로 현실을 마주하는 정공법을 택한다. 그는 패니에게 독설을 퍼부었던 프와네 선생을 찾아가 공손히 조언을 구했다. 뜻밖에도 선생님은 흔쾌히 그림을 보자며 그의 집까지 따라왔고 그림을 모두 본 스승은 제자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나는 이 조언이 그 어떤 조언보다 굉장히 현실적이면서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현실은 처절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주인공으로서 살아내야만 하는 필립에게 꼭 필요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인생 선배로서의 진심 어린 말이기도 하고. 현실에서 이 정도로 솔직한 이야기를 듣기도 쉽지 않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 의사결정을 내린 필립은 결국 파리에서 다시 고향(영국)으로 돌아온다. 그의 백부는 런던과 파리에서 허송세월만 보낸 것이 아니냐고, 네 인생에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니냐고 필립을 몰아세우지만 그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파리에서의 경험은 절 반 이상 남은 그의 인생에서 앞으로 만날 갈림길에서 가장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방향성이지 않는가. 충분한 경험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된 그는 의사로 살아가기 위해 다시금 학교에 입학하며 이야기가 이어진다.


지금까지 의사결정을 하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했건만 이 책을 읽고 나서 돌이켜보니 생각을 현실로 만들기까지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예를 들면 학창 시절 미국 워싱턴 DC로 인턴십을 다녀왔는데 군생활을 하며 읽었던 수많은 외국 에세이(진중문고), 그리고 먼저 다녀온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 또한 그러한 목표를 세울 수 있었다. 엔지니어를 거쳐 인사팀에서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할 때에도 팀의 일원으로 일하고 있는 선배들과 대화하고 면담하면서 이러한 조직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었다. 그 후에는 와이프와 대화하면서 내가 원하는 것들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고 새로운 업무를 맡아 고군분투하며 결국에는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다. 앞으로도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나 스스로에게도, 주변사람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치며 지내겠다고 다짐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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