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600km를 달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by J브라운




한 3주 전쯤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평소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전화를 잘하지 않으시는 아빠에게서 걸려온 전화. 무슨 일이신가 싶어 냉큼 받아봤더니 대뜸 11월 5일에 다른 약속이 있는지부터 물어보시는 아빠. 아직은 별일 없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럼 그날 친할아버지 제사에 함께 가자고 하셨다.


"할아버지 제사요? 갑자기요?"


갑작스러운 아빠의 말씀에 살짝 당황을 한 내 목소리가 조금 커지는 게 느껴졌다. 할아버지 제사라..


할아버지, 할머니


친할아버지는 4살 때, 친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셔서 내겐 두 분에 대한 기억이 없다. 단지 사진으로만 몇 번 만나 뵐 수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두 분에겐 별다른 느낌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 두 분 모두 교회에 다니시는 터라 제사를 챙기지도 않았고 거리도 멀다 보니 내가 어렸을 때부터 두 분의 제삿날엔 아빠 혼자 고향(전북 고창)에 계시는 첫째 큰아버지 댁에 내려가셔서 제사에 참석하시곤 했다.


아버지 혼자 다녀오시는 게 당연한 일이 되었고 그 이후로 긴 시간이 지난 지금, 갑자기 함께 가자시는 말씀에 솔직히 조금 당혹스러움이 느껴졌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많이 죄송스러웠다.)


형들도 다 가는 거냐는 내 물음에 올 해는 먼저 나만 가고 이제부터 해마다 아들 삼 형제가 돌아가면서 한 명씩 같이 참석하는 걸로 하자고 말씀하시는 아빠. 이런 자리라도 가야 사촌 형제들 얼굴도 보고 하는 거라는 말씀에 "네, 그럼 제가 모시고 갈게요."라고 말씀을 드렸다. 당일치기로 새벽에 출발해서 저녁에 다녀오는 일정.

평소 강원도까지도 당일치기로 다녀오기에 장거리 운전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지만 너무나 오랜만에 보게 될 친가 친척들에 대한 어색함이 벌써부터 걱정되기 시작했다. 얼마 만에 보게 되는 건지 기억도 잘 안 난다.


사촌.. 가깝고도 먼


아빠는 7남매 중 여섯째고 남자 형제 중에선 막내다.

아빠 밑으로는 고모가 한 분 계시는데 고모는 내가 어렸을 때 미국인 고모부와 결혼을 하시고 이민을 가셨다. 한국에 계시는 형제 중에선 아빠가 막내인 셈인데 큰아버지들, 고모님과도 나이 차이가 제법 있는 편이어서 아빠 조카(나에겐 사촌형님)중 가장 큰 조카와 아빠의 나이 차이는 겨우 4살밖에 나지 않는다.


친가 사촌들 대부분은 나보다 나이가 10살 이상은 많아서 초등학교 때 명절이라고 부모님과 인사를 가면 이미 결혼을 해서 아이까지 낳은 촌형님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촌 형, 누나들이지만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거의 아버지 뻘이라 어렸을 때부터 많이 어려워했고 그것도 중고등학교 이후론 친척집에 가는 걸 피하기 시작해 지금은 거의 교류가 없다 보니 이젠 길 가다 마주쳐도 모를 지경이다.


아빠는 평소에도 사촌 형제들끼리 가까이 지내야 한다며 이런 부분에 대해 못마땅함을 내비치시곤 하셨는데 그때마다 난 나이 차이도 워낙에 많다 보니 공감대 형성이 어려워 어색하고 불편해서 어쩔 수 없는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개념이 점점 축소되는 시대의 흐름에 옛날 사람인 아빠가 적응을 못하시는 거라 생각하곤 했다. 내 또래들 대부분은 나와 같은 생각이지 않을까 싶었다.


출발


11월 5일 토요일.

전날 아빠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아침 일찍 본가로 모시러 가겠다는 내 얘기에 어차피 내려가려면 우리 동네(경기 군포)에서 만나는 게 낫다며 아침 6시 30분까지 인근 지하철역으로 오시겠다는 아빠. 그리고 넷째 큰아버지도 함께 가실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토요일 이른 아침, 두 분을 모시고 가족묘가 있는 전북 고창으로 출발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친가 가족묘지에 함께 모셔져 있다. 지금은 그곳에 첫째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도 돌아가셔서 함께 모셔져 있는데 내가 그곳을 가본 건 큰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마도 2009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도 장례식장에서 사촌 형, 누나들을 보고선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어 상당히 당황을 했던 게 생각난다.

게다가 사촌들 중 남자 형제만 10명이 넘는데 나를 포함해 모두 같은 돌림자를 쓰고 있다 보니(이름 석자 중 가운데 한 글자만 다른 상황이다.) 이름을 들어도 자꾸 헷갈리기도 했다. 이번에 가면 그때 이후로 처음 보게 되는 거라 벌써부터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아버지 말씀처럼 평소 명절 때라도 얼굴을 좀 보고 살았어야 했나 싶은 후회 아닌 후회가 밀려왔다.


가족묘까지 거리는 270km. 서해안 고속도로를 쭉 타고 가는데 토요일 제법 이른 시간에 출발했음도 서해대교에 가까워지자 정체가 시작됐다. 다행히 정체가 심하지 않아 금방 지나올 수 있었고 그 구간을 지나자 는 막히는 곳이 없었다. 중간에 휴게소에서 아침도 먹고 졸리면 조금 쉬면서 여유 있게 내려왔더니 11시 30분쯤 가족묘에 도착했다. 아침부터 운전을 5시간이나 했다니.. 벌써부터 돌아가는 길이 걱정됐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아빠와 넷째 큰아버지가 나누시는 말씀을 들으며 나와 부모님 세대가 가지는 가족에 대한 생각의 차이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먼저 두 분은 우리 가문에 대한 애정이 깊으셨다.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예전 양반 가문이었다는 것에 자부심이 있으셨고 가족묘 관리에 대한 책임감, 조부모님 제사가 당신들 대에서 끊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가지고 계셨다.


또한 사촌끼리 왕래가 많지 않아 예전과 달리 친척간 유대감이 없는 점에 대해 많이 아쉬워하셨는데 내겐 보수적이라 느껴지는 것들이 두 분껜 후대에서 잘 지켜지지 않아 안타깝고 이로 인해 선대에는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지시게 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실 할아버지 제사에 가자는 아빠의 말씀에 일단 간다고는 대답했지만 기껏해야 1시간 정도 진행될 제사를 위해 왕복 10시간을 걸려 다녀오는 것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대중교통으로 가려해도 워낙에 시골이라 쉽지 않은 곳이고 아빠도 칠순이 넘으셔서 오가는 게 많이 힘드실 텐데 이젠 다른 방법을 찾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아빠와 함께 다녀오면서 이런 부분에 대해 말씀을 좀 나눠봐야겠다 싶었는데 두 분의 대화를 듣고 있으려니 도저히 이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1년에 한 번 찾아뵙는 것도 죄스럽다 하시는 두 분께 어떻게 이 얘기를 꺼낼 수 있었을까. 아빠에겐 너무도 당연한 것이 내겐 선택의 문제로 생각되는 것. 이 점이 아빠와 나의 차이였고 아빠에게 가족이란 내가 생각하는 가족의 의미보다 몇 배는 더 큰 것이었다.


도착하니 우리가 꼴등이었다. 몸이 아프셔서 참석하지 못하신 둘째 큰아버지와 고모님들 식구들을 제외하고 대략 스무 명에 가까운 친척들이 모였다. 오랜만에 셋째 큰아버지를 비롯해서 친척 분들께 인사를 드렸다. 그래도 10년 전 큰어머니 장례 때 뵌 적이 있어서인지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게 도착 전만 해도 너무 어색하고 뻘쭘할 것 같았는데 막상 얼굴을 보며 인사를 드리고 나니 생판 남을 만날 때 와는 다른 약간의 편안함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단지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느껴졌던 자그마한 편안함. 그래서였는지 낯선 사람들과의 자리를 극도로 불편해하는 내게 그 자리는 생각했던 것만큼 부담스럽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이게 가족이구나 싶어졌다.


제사를 드리면서 가족묘에 있었던 시간은 대략 30분 남짓이었다. 날씨도 많이 춥고 해서 서둘러 자리를 마무리하고 식당으로 이동해 점심을 먹었다. 식사를 하며 사촌형님들과 어색하지만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눴다. 어렸을 때 아빠를 따라 명절에 찾아뵀던 얘기, 그때 그 꼬맹이가 벌써 나이 40이 넘었다는 얘기에 깜짝 놀라시는 모습들, 이럴 때라도 종종 얼굴을 보고 살자는 얘기 등.. 가족이라서, 가족이기에 정말 오랜만에 만나 중간중간 얘기가 끊기는 정적의 시간이 있었음에도 그 시간이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빠의 말씀처럼 지금이라도 사촌들과 종종 왕래를 하며 지내야겠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게 됐다. 물론 가장 큰 사촌 형님이 곧 칠순이시라 여전히 편한 동네 형 같은 느낌은 아니지만.


아버지의 형제들


돌아오는 길에 둘째 큰아버지가 입원해 계시는 무안에 들르기로 했다. 가족묘에서 병원까지는 50km 정도를 내려가야 했다. 차로 한 시간 정도 달려 병원에 도착해 둘째 큰아버지를 뵈었는데 낙상사고로 허리를 다치셔서 잘 걷지를 못하셨다. 인사를 드리고 아빠가 둘째, 셋째, 넷째 큰아버지들과 담소를 나누시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그제야 아빠도 정말 막내였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형들 틈에서 웃으며 이야기 꽃을 피우시는 모습. 최근에 내가 아빠의 이런 환한 모습을 본 적이 있었던가 싶었다. 그러고 보면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네 분의 얼굴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가족


아이처럼 웃고 떠드는 네 분의 모습은 가족이라는 의미를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1951년, 한국 전쟁 중에 태어나신 아빠는 대부분의 내 부모님 세대가 그러하듯 열악한 환경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셨을 거고 그런 힘든 시간을 함께 한 형제들과의 정은 지금의 우리 형제들보다 훨씬 더 깊고 끈끈하리라. 큰 형님은 몇 년 전 이 세상을 떠났고 이제 막내마저 칠순을 넘겨버린 지금, 아버지와 아버지의 형제들은 어떤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계실까. 비록 병원이었지만 웃으며 얘기를 나누시는 그 모습에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집으로


병원에서 잘 가라 마중을 해 주시는 둘째 큰아버지의 조금은 쓸쓸한 모습을 뒤로하고 집으로 향했다. 내비를 보니 새벽에 두 분과 만났던 지하철역까지 310km가 찍혔다. 아빠와 큰아버지는 이제 돌아가는 일만 남았으니 천천히 올라가자 하셨다. 내려올 때와 마찬가지로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올라가는데 막힘없이 잘 가다가 당진을 지나 서해대교를 10km 정도 앞두고 드디어 정체가 시작됐다.


정체가 시작되면서 도착시간도 계속 늦어졌는데 내려올 땐 쉴 틈 없이 말씀을 나누시던 두 분이 어느새 곤히 잠들어 계신 게 백미러로 보였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길이었지만 두 분이 깨시지 않도록 최대한 부드럽게 운전을 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을 더 달려 두 분을 픽업했던 지하철역을 찍고 집에 도착했다. 왕복 600km가 넘는 거리, 운전만 10시간을 했던 긴 하루가 그렇게 끝이 났다.


몸은 피곤했지만 이대로 주말을 끝내기엔 뭔가 아쉬워서 아내와 집에 있는 캔 맥주를 집어 들었다. 맥주잔도 살짝 얼려 시원하게 한 잔 마시며 오늘 아버지와 함께 하며 느꼈던 것들을 하나하나 다시 생각해봤다.


여전히 부모님 세대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이건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나와 부모님 간 생각과 가치관의 차이일 뿐이니까. 분명 다름이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오늘 하루 아빠의 모습을 보면서 아빠를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는 건 확실하다.


종종 아빠와 대화를 하면서 벽다 얘기를 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종교나 가족에 대한 얘기를 할 땐 더 그렇다. 아마 아빠도 나와 비슷한 느낌이시겠지.

아무리 대화를 해봐도 서로의 생각이 이해되지 않고 그러다 가끔은 언성이 높아지기도 하는데 그런 수 백 마디의 말보다 함께 한 오늘 하루가 아빠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겪어왔던 시대적 환경이 너무도 다르기에 아직도 아빠를 다 이해할 순 없지만 평소 가장으로서 근엄한 모습만 보이셨던 아빠에게서 볼 수 없었던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 막내로서의 모습을 보게 된 건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듯하다.


오늘, 아빠와의 마음의 거리가 한 발자국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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