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실내코트를 뜨겁게 달구는 농구와 배구의 시즌인데 두 종목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난 매일같이 있는 경기에 어떤 팀을 응원하며 TV를 볼지 고민이 깊어진다. 물론 최애 팀 경기가 있는 날은 이런 걱정이 없지만 그렇지 않은 날엔 이 경기를 봐야 하나 저 경기를 봐야 하나 정말 선택하기가 어렵다.(그래서 매번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보곤 한다.)
그런데다 올 해는 월드컵까지 겹쳐서 너무 감사하게도 내겐 볼거리가 차고 넘치는 계절이 됐다.하지만 내가 아무리 농구와 배구를 좋아한다 해도 4년에 한 번 열리는 월드컵보단 아니다.
올 겨울, 12월까진 무엇보다 월드컵이 먼저다.
2022 카타르 월드컵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겨울에 개막한 2022 카타르 월드컵.시차 때문에 걱정이 많았는데 그래도 우리나라 경기는 밤 10시와 12시에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월드컵을 목표로 선임된 벤투 감독의 지도 아래 10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의 쾌거를 이룬 우리나라.
손흥민이라는 EPL에서도 톱클래스의 공격수가 있기에 이번 월드컵은 더욱 많은 기대가 됐는데 웬걸, 개막을 얼마 앞두고 손흥민 선수는 얼굴 부위에 큰 부상을 당했고 결국 마스크를 쓴 채 경기에 나서게 됐다. 그의 열정과 투지에 큰 박수를 보내지만 혹 이번 월드컵에서 부상이 더 심해지진 않을지 걱정이다. 손흥민 선수뿐만 아니라 대표팀 선수들 모두 부디 부상 없이 월드컵을 잘 끝내고 오길 바라본다. 무엇보다 건강이 최고다.
내게 월드컵 하면 역시나 2002년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우리나라가 4강 진출이라는, 말 그대로 꿈은 이루어진다는 감동의 드라마를 썼던 2002 한일 월드컵. 그 해 6월 초 군 전역을 한 나에게 밖에서 맞는 월드컵 열기는 상상 이상이었다. 경기가 있는 날은 술집, 거리, 주택가 그 어디에서든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이 소리가 들려왔다.
2002 한일 월드컵, 꿈은 이루어진다!!
난 대부분 동네 술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응원을 했는데 경기 내내 술집에 있는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목이 터져라 정말 열심히 응원을 했더랬다. 골이라도 하나 터지면 알지도 못하는 주위 사람들을 부둥켜안거나 눈이 마주치는 그 누구와도 하이파이브를 했던 그때. 이탈리아를 좋아하던 친구 놈이 우리나라와 이탈리아의 16강전이 있던 날 가방에 이탈리아 국기를 꽂고 와 우리를 식겁하게 했던 2002년 6월의 대한민국은 온통 붉은 물결 그 자체였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
몇 년째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코로나와 얼마 전 있었던 이태원 참사로 이번 월드컵은 거리응원 없이 지나가나 싶었는데 조건부로 허가가 났다. 그리고 우루과이전, 광화문에서 있었던 길거리 응원의 모습을 TV로 봤는데 그걸 보고 있으려니 2006년 독일 월드컵이 생각났다. 우리나라의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였던 스위스전 때 길거리 응원을 하겠다고 여자 친구(지금의 아내)와 광화문에서 돗자리를 깔고 앉아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외쳤던 그날. 그때는 참 젊었구나 싶다. 지금은 밤 10시 경기를 보면서도 졸음을 쫓느라 정신이 없는데.
무심하게 흐르는 세월이 참으로 안타깝다.
대~한민국
첫 경기 우루과이전은 0:0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예상외로 우리나라가 경기 초반부터 주도권을 쥐고 경기를 풀어나갔는데 골이 안 터지는 게 너무나 아쉬웠다. 그리고 주심의 판정도 납득하기 어려웠는데 충분히 파울인 것 같은 상황에서도 휘슬을 불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상대인 우루과이는 날카로운 슈팅으로 우리나라 골대를 2번이나 맞혔는데(얼마나아찔했던지)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듣는 라디오에서는 이 경기를 이렇게 평가했다.
12대 12.
우루과이는 주심까지 12명, 우리나라는 골대까지 12명이 뛴 시합이었다고.
첫 번째 경기 우루과이전
16강 진출의 중요한 고비가 될 두 번째 경기 가나 전.
이번 월드컵 진출 국가 중 피파 랭킹이 가장 낮은 가나이지만 아프리카 팀은 무시할 수 없는 저력이 있다. 피지컬과 유연성, 개인기가 좋고 한 번 기세를 타면 걷잡을 수 없이 무서워지는 게 아프리카 팀들의 특징이다. 포르투갈에 패배를 당한 가나와 첫 경기 무승부를 기록한 우리나라에게 이번 경기는 16강 진출을 위해 반드시 잡아야 할 경기. 우루과이전과 마찬가지로 초반 경기 주도권을 잡아나가던 우리나라. 몇 번 이어지는 세트피스 상황을 살리지 못하는 게 아쉽다 싶은 그때, 가나가 선제골을 넣었고 이후 추가골까지 넣어 전반은 2:0으로 종료됐다.
전반 초반, 많은 찬스에서 한 골만 터졌다면 어땠을까. 후반도 쉽지 않겠다 싶었는데 후반전이 시작되고 얼마 후 교체로 들어온 이강인 선수가 드디어 한국의 첫 번째 골을 만들었다. 공격 진영에서 압박으로 공을 뺏은 후 조규성의 헤더 골을 어시스트했다. 그리고 불과 3분 뒤, 우리나라는 동점을 만들었다. 이제 승리까지도 바라볼 수 있겠다 싶었는데 이런 분위기에 찬 물을 끼얹는 가나의 세 번째 골이 터졌다. 그리고 경기는 그대로 종료. 결국 3:2로 패했고 이제 마지막 경기인 포르투갈 전을 무조건 이기고 가나와 우루과이전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됐다.
두 번째 경기 가나전
아쉬웠다. 이길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하지만 이미 경기는 끝났고 이제 남은 포르투갈전을 잘 준비해야 한다. 설상가상으로 벤투 감독은 경기 후 주심의 이해할 수 없는 판정에 항의하다(정말 너무한 거 아닌가 싶다. 마지막 코너킥을 주지 않다니) 레드카드를 받아 다음 경기에선 벤치에 앉을 수 없다. 감독 없이 가장 중요한 마지막 경기를 치르게 된 우리나라.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는 월드컵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강했던 기억이 있다. 지난 월드컵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인 독일전에서도 2:0으로 이겼고 2002 월드컵에선 다시 맞붙게 된 포르투갈을 1:0으로 꺾었다. 부디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가 있기를. 이번 주 토요일 자정에 있을 시합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우리 선수들
벤투 감독은 한국 축구 역사상 이례적으로 월드컵을 대비해 선임돼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국가대표를 지휘해 왔다. 그리고 이제 그 결실을 맺을 시간이다. 물론 지금의 성적이 응원하는 내 입장에서는 조금 아쉽게 느껴지긴 한다. 두 경기 모두 충분히 이길 수도 있는 경기였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그냥 TV로 지켜보는 내 마음도 이 정도인데 4년 동안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 온 벤투 감독과 함께 여기까지 달려온 선수들은 어떤 심정일까.
난 어떤 스포츠 종목을 보든 간에 조용히 보는 편은 아니다. 농구를 볼 때도, 배구를 볼 때도 기쁘면 소리 지르고 아쉬우면 탄성을 내뱉곤 한다. 이번 월드컵을 보면서도 그러고 있다. 찬스가 날아가면 너무나 아쉽고 골을 먹으면 맥이 쭉 빠진다. 우루과이전 황의조 선수가 결정적인 찬스를 놓쳤을 때 '아니 어떻게 저걸 놓치나' 싶은 마음에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는데 사실 나도 잘 안다. 그 찬스를 그렇게 날린 선수 본인 마음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거라는 걸. 응원할 땐 그저 승리를 바라는 마음에 잘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경기가 끝나고 나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가나전 이후 황인범 선수가 구자철 선수의 품에 안겨 우는듯한 사진을 봤는데 그걸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참 짠했다. 황인범 선수는 가나전에서 머리가 찢어져 출혈이 있었고 지혈을 위해 머리에 감은 붕대가 벗겨지자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그라운드를 누볐다. 말 그대로 투혼이었다. 1차전 후 종아리 쪽에 이상이 있는 듯했던 김민재 선수도 경기 막바지까지 악착같이 뛰었고 마스크를 써서 이래저래 힘든 경기였을 손흥민 선수도 마지막엔 헤딩 경합까지 하기도 했다.
응원하는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승리가 절실했을 선수들. 국가대표로 태극기를 달고 4년에 한 번 있는 이 큰 대회에서 그것도 수만 명의 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기를 치른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 긴장과 압박감이 어땠을지 겨우 20명 남짓 한 사람들 틈에서 의견을 말하는 것도 벅찬 나로선 가늠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선수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정말 열심히 잘 뛰고 있다. 강호 우루과이를 상대로 초반부터 기세를 올려 무승부 경기를 만들었고 2:0으로 뒤지고 있던 가나전에서도 3분 동안 2골을 몰아쳐 경기를 박빙의 승부로 이끌고 갔다. 그리고 지금껏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이렇게 초반부터 경기를 주도해 나가는 건 정말이지 본 적이 없었다. 멋지다 대한민국, 잘 싸웠다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 파이팅
이제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가 토요일 자정에 열린다.
물론 포르투갈을 꺾고(호날두에게 본때를!!) 운이 좋아 16강에 진출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우리 선수들 충분히 최선을 다했고, 다할 테니 우리 모두 결과에 상관없이 큰 박수를 쳐주는 건 어떨까.
경기에 뛰고 있는 선수들의 모습이 응원하는 누군가의 시선엔 못마땅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선수 역시 누구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본인이 가진 전부를 그라운드에서 쏟아내고 있음을, 그리고 선수에게 필요한 건 질책과 비난의 야유가 아니라 우리의 진심이 담긴 응원과 위로임을 다시 한번 마음속에 되새겨야겠다.
이제 정말 코앞이다.
우리 선수들 마지막까지 준비 잘해서 멋진 모습으로 만나게 되기를. 하지만 무엇보다 부상은 당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