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중엔 소위 '무개념'인 사람들도 많은데 지하철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 경찰에게 욕을 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학생, 주차장 자리를 맡는 사람 등 그 모습은 참으로 가지각색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우리 아파트에도 한 명의 빌런이 나타났다. 종종 지하 주차장에 그 흔적을 남기고 사라지는 이 악당. 도대체 누굴까?
누구냐 넌
내가 사는 아파트는 연식이 조금 돼서 지하 주차장이 아파트 내부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지하 주차장으로 가려면 건물 밖으로 나가 계단을 이용해야 한다. 그런데 얼마 전 출근시간부터 이 계단에서 담배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냄새는 계단을 지나 주차장으로까지 이어졌는데 처음엔 그냥 그러려니 했지만 지속적으로 냄새가 나는 걸 보니 분명 상습적으로 여기서 흡연을 한 것임이 분명했다. 아마도 주차장에서부터 흡연을 하며 계단을 올라왔거나 그 반대이거나. 어찌 됐든 이는 분명 잘못된 행동이고 비흡연자에게 담배 냄새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다. 특히나 여긴 실내가 아닌가. 이른 아침부터 풍겨오는 담배냄새에 나와 아내는 자주 기분이 몹시 언짢아졌다. 정말 누굴까.
이곳은 산 가까이에 있는 아파트라 아침에 1층 공동현관을 나서면 공기가 꽤나 상쾌한데 주차장으로 향하며 종종 맡아야 하는 이 냄새는 기분을 확 망쳐버리기에 더욱 화가 나곤 했다. KF94 마스크까지단 번에 뚫고 들어오는 참을 수 없는 냄새. 하지만 누군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아 진짜 누굴까? 한 번 딱 걸리기만 해."
라고 말하는 나에게 아내는
"보면 어쩔 건데? 뭐라 하게?"라고 물었다.
"당연히 뭐라 해야지. 실내 주차장에서 담배 피우는 게 말이 되는 거야?"
"여보, 직접 얘기하지 말고 관리실에 얘기해. 괜히 엮였다가 어떻게 될지 몰라."
걸리기만 해 봐라 하고 있는 나에게 아내는 직접 얘기하지 말고 관리실에 말하라 했다. 근데 관리실에 말해봤자 안내 방송만 할게 뻔하고, 이걸로 고쳐질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실내에서 흡연을 하지도 않았겠지. 이 점을 아내에게 얘기했더니 그래도 직접 얘기하는 건 하지 말라 한다.
"직접 얘길 안 하니까 그런 거 아닐까? 첨엔 해도 되나 싶었다가 주위에서 아무도 뭐라 안 하니까 이젠 그냥 막 하는 거 같은데."
"그건 그렇긴 한데 그래도 직접 얘긴 안 했으면 좋겠어. 서로 얼굴 붉히고 괜히 싸움만 나고, 뭐 좋을 거 있겠어."
워낙에 세상이 흉흉하고 이상한 사람들도 많다 보니 아내의 걱정도 이해가 됐다. 하지만, 정말 이렇게 피해를 보면서도 그냥 참아야 하는 걸까 싶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범인을 만나게 됐다.
이웃사촌
요즘은 많이 쓰지 않는 말인 '이웃사촌'.
가까이 사는 이웃끼린 정이 들어 어지간한 사촌들보다 관계가 깊다는 말인데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정말 그랬다. 옆집은 물론이고 위, 아랫집들까지 서로 반갑게 인사하며 어느 정도 유대감을 가지고 지냈던 시절.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이웃을 만나도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고 인사는커녕 핸드폰을 보거나 멀뚱멀뚱 앞만 보고 서 있곤 한다. 게다가 이곳으로 이사 왔을 땐 이미 코로나 시국이라 마스크를 쓴 이웃들의 얼굴만 볼 수 있었는데 이제 마스크를 벗게 되자 누가 누군지 더 알아보기어렵게 됐다. 그나마 옆 집 하고는 만나면 인사라도 하는 정도이니 다행이랄까.
이제 더 이상 우리 사회는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곳이 됐다. 아니, 오히려 요즘은 이웃끼리 불화가 생기는 경우가 더 많다. 대표적으로 층간소음이 있고 우리 아파트의 경우 세대 내 실내흡연으로 인해 이웃에서 피해를 보는 사람들도 많다.
나 역시도 작년 여름, 밤만 되면 베란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담배 냄새에 한참을 고생해야 했다. 다시 얘기하지만 비흡연자에게 담배 냄새는 정말 고역이다. 참다 참다 결국 담배 냄새가 들어올 때면 베란다 창문을 열고 "담배 좀 나가서 핍시다."라고 소리치기도 했고 A4용지에 실내 흡연을 삼가해 달라는 호소문을 적어 엘리베이터 내부와 1층 게시판, 그리고 각 층에 붙여놓기도 했었다. 뭐 그런다고 크게 나아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당신 때문에 누군가 피해를 보고 있다는 건 꼭 알려주고 싶었다.
범인은... 바로!!!
지하 주차장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한 명이진 않겠지만 나와 아내의 출근 시간대에 담배를 피우는 범인은 바로 같은 동 주민이었다. 나와 아내는 출근 때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운동삼아 걸어 내려온다. 그날은 1층으로 내려온 우리 옆으로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우리 앞에서 성큼성큼 걷던 그는 주차장계단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담배를 꺼내어 물더니 바로 불을 붙였다. 그 모습에 순간 화가 나서 한 마디 하려는데 아내가 내 팔을 잡아챘다.
왜냐고 묻는 내게 아내는 같은 동 사람인데 얼굴 붉혀서 좋을게 뭐가 있냐며 참으라 했다. 관리실에 말하라며 끝끝내 나를 말리던 아내. 난 이 상황이 너무 싫었다. 아침마다 담배냄새 때문에 짜증이 나는 것도, 뻔히 잘못을 한 사람이 바로 앞에 있는데 뭐라 할 수 없는 것도. 게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실내에서 흡연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보고 있자니 화가 확 치밀었다.
그는 여기에서의 흡연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이나 거리낌이 없는 듯했다. 그 이후로도 아침 출근시간에 여러 번 이 모습을 보기도 했고 한 번은 퇴근 후 지하 주차장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본인 차를 대고 내리자마자 바로 담배를 피우며 그대로 주차장을 가로질러 가던 모습엔 정말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하.. 정말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상식이 통하는 사회
아내의 걱정을 이해한다.
워낙에 세상이 무섭고 이상한 사람이 많다. 그리고 입 바른 소리 한 번 했다가 오히려 피해를 보는 경우도 많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아니다. 게다가 어찌 됐든 이웃이다. 아무래도 좋게만 얘기할 순 없을 텐데 나중에 이래저래 마주칠 걸 생각하면 그것도 신경이 쓰였다.
그렇다고 이 피해를 고스란히 받는 건 더 싫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 끝에 결국 A4용지에 편지를 썼다.
지난번 퇴근 후 주차장에서 그를 봤을 때 그의 차종과 차 번호를 봐뒀다. 관리실에라도 얘길 할까 싶어서. 하지만 방송으로 과연 이게 고쳐질 것인가. 아마 본인 얘기인지도 모르겠지. 직접 말하지 않으면서 이 피해를 알리는 방법으로 편지가 가장 좋을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차주님, 많이 놀라셨죠? 다름이 아니라 한 가지 부탁드리고자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차주님이 지하 주차장을 오가시며 흡연하시는 걸 종종 봤습니다. 저같은 비흡연자에게 담배 냄새는 정말 참기 힘든 고역입니다. 저희 같은 사람들을 생각해 주시고 주차장 밖으로 나오시면 흡연장소가 가까이에 있으니 죄송합니다만 실외에서 흡연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최대한 정중하게(그래야 끝까지 읽을 테니) 그리고 읽는 동안 기분이 나쁘지 않으면서도 피해를 잘 알릴 수 있도록 써서 그 양반 차 앞유리 와이퍼에 끼워뒀다. 과연 이 편지가 얼마만큼의 효과를 낼 수 있을까? 일단은 피해를 알린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 이후로 아침마다 나와 아내를 괴롭히던 담배 냄새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편지 때문인지 그가 이사를 간 건지 아니면 실외 주차장을 이용하는 건지. 하지만 진짜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난 상식이 통한 거라 믿기로 했다. 이게 맞는 거니까.
그동안 날 괴롭히던 아침의 스트레스가 큰 문제없이 해결돼서 다행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똥이 더러워서 피해야 하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래도 많은 빌런들에게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길 조심스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