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재즈음악과 통창으로 들어오는 밝은 햇살,그리고 적당한 사람들의 대화소리.
주위의 모든 것들이 잘 어우러져 빈백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우리에게 기분 좋은 나른함을 선사해 주고 있었다.
"요즘 정말 생각이 많았거든."
나란히 앉아 한 동안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던 지수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었어?"
갑작스러운 지수의 얘기에 나른해져 있던 몸의 감각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이내 곤두서는 게 느껴졌다.
"아니, 별건 아니고. 그냥..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싶어서."
"갑자기 무슨 소리야?"
"지금 내가 잘 살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서. 너 알지? 내가 얼마나 광고 쪽 일 하고 싶어 했는지. 분명 좋아하는 일이라서 들어갔던 회사인데 이젠 이게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인가 싶어. 거의 매일 야근하면서 하루에 10시간 넘게 일하는데 전혀 즐겁지가 않아. 명확하게 업무 지시도 안 하면서 팀원들 성과만 자기 걸로 쏙 빼가는 팀장도 정말 싫고 남들보다 한 발 앞서 가겠다고 이 악물고경쟁하려는 회사 사람들한테도 지치고.근데 더 어이없는 게 뭔 줄 알아? 이렇게 사무실에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집에 오면 진이 다 빠져서 정말 아무것도 못하고 씻고 잠자기 바쁘다는 거야. 집에 오면 11시가 넘는데 뭘 할 수 있겠어. 이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게 맞는 걸까?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생각하면 막막하기만 해. 너무 혼란스러워."
지수는 광고 쪽 일을 해보고 싶다며 대학 졸업반 때 광고회사만 죽어라 찾아 입사지원을 했다. 그럴 때마다 난 지수의 면접관이 되어 녀석이 뽑아온 예상질의로 모의면접을 봐주곤 했다. 몇 번의 실패로 의기소침하던 지수가 업계에서 나름 이름 있다는 회사의 합격소식을 듣고 눈물을 글썽이며 기뻐하던 모습을 난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청춘
졸업반이었던 지수와 아직 3학년이었던 난 겨울이 코앞으로 다가온 11월의 어느 날 학교 소나무숲 벤치에 앉아 있었다. 친구들과 대낮부터 학교 앞 술집에서 거하게 한 잔 마시고 집에 가려다 문득 도서관에서 취업준비를 하고 있을 지수가 생각나 녀석을 도서관 앞 소나무숲으로 불러냈었다.
도서관 입구로 지수의 모습이 보이자 난 녀석을 불렀다.
"이지수!"
술이 좀 취해서였는지 생각보다 목소리가 컸고 그 소리에 지나가던 학생들이 나를 쳐다봤다. 당황한 날 앙칼진 눈빛으로 쏘아보던 지수는 뛰어오더니 내 팔을 휙 잡아채 도서관 앞 소나무숲으로 끌고 갔다.
"야~ 창피하게 왜 이러는데! 너 술 마셨어?"
"와 귀신이네. 어떻게 알았어? 나 친구들이랑 한 잔 했는데. 술냄새 많이 나냐? 후~후~."
"그만해라. 아 술냄새! 너 진짜 죽을래?"
지수와 친해지면서 녀석을 놀리는 게 꽤나 재미있는 일이란 걸 알게 됐다. 지수는 항상 눈빛만 앙칼지게 지을 뿐, 내가 하는 모든 장난을 받아준다. 화 한번 내지 않고.
"알았어 그만할게 후~~~~~."
"하지 말라고 쫌!!"
이번엔 지수가 주먹으로 내 팔을 쳤다.
"알았어. 알았어. 진짜 안 할게 때리지 마. 아파!"
맞으면서도 난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계속 웃고 있었다.
"커피 한 잔 하면서 바람 좀 쐬라고 연락한 거야. 자"
한 손에 조심스레 들고 있었던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지수의 손에 쥐어주며 물었다.
"이지수, 아직 괜찮지?"
지수는 내 물음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순간 지수의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번호를 확인하던 지수의 표정이 달라졌다.
마치 내가 대기업에 취업이라도된 것처럼 기분이 좋아져 지수의 어깨를 두드리며 축하해 줬다.
이 날, 지수는 그대로 도서관으로 들어가 짐을 싸서 나왔고 우리는 밤늦게까지 축하주를 마셨다. 아직 학생인 난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날 지수의 발걸음을 응원했고 지수는 넘치는 열정으로 회사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겠다며 전의를 불태웠다.
청춘이었다.
언제나 네 편
"이지수,많이 힘들었구나? 너 스트레스받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왜 그동안 다 얘기 안 했냐? 내가 뭐라 답을 찾아주진 못해도 니 얘기 들어줄 수는 있는데."
"오.. 뭐야 너? 웬일로 말 예쁘게 한다? 고맙다 야. 역시 친구가 최고야."
"힘들 땐 혼자 꾹 참지 말고 누군가에겐 말해야 한대. 나 너무 힘들다고. 그렇게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그 감정이 많이 해소된다고 하더라. 그니깐 나한테라도 얘기해 줘. 알지? 난 언제나 네 편인 거."
학생 신분을 벗어던지고 사회인이 되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바쁘다. 힘들어도 아닌 척, 불편해도 아닌 척, 전혀 즐겁지 않아도 그렇지 않은 척. 언저까지 이래야 하는 걸까. 어쩔 수 없는 거라면 적어도 나만큼은 지수에게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 되고 싶었다. 힘들고 지칠 때 자신을 돌아보고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얘가 오늘 왜 이래? 뭐야 너, 은근 감동인데? 너도 나한테 다 얘기해. 알았냐? 친구 좋다는 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