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가 묻는다. 이 단순 명료한 질문에 난 뭐라 답을 하지 못한다. 이놈의 결정장애. 특히나 음식을 고르는 데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이럴 땐 그냥 누가 정해주는 게 마음 편하고 좋다.
이런 내 성격을 아는 지수가 메뉴를 몇 개 골라준다.
"내가 몇 개 찾아봤는데, 먼저 강릉이니까 초당 순두부 어때? 이거 유명하잖아. 아니면 바닷가니까 회? 이것도 별로면 조개구이? 참고로 난 아무거나 괜찮음."
"알잖아.. 나. 결정장애..이왕 찾은 김에 선택까지 해줘. 난 진짜 이런 거 너무 어려워. 이게 다 주입식 교육의 폐해라니까."
점심메뉴 고르는 일로 주입식 교육까지 들먹이는 내가 웃기지도 않았는지 지수는 짧게 실소를 내뱉고는 예의 그 앙칼진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초당 순두부. 됐지?"
"오케이, 가자."
강릉은 1년에 한 번 정도는 오는데 그때마다 초당 순두부 마을엔 사람이 많아서 그냥 지나치곤 했다. 원체 식당에서 줄 서는 걸 싫어하기도 하고 솔직히 '순두부가 거기서 거기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완 다르다. 맛이 궁금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지수가 고른 거니까.
순두부 마을까지 도보로는 시간이 좀 걸려서 차를 가지고 왔다. 마을 초입에 있는 가게에 주차 자리가 비어있어 바로 차를 대고 들어왔다. 2층짜리 건물인데 1층은 이미 만석이었고 2층도 매장 절반이 손님들로 차 있었다. 정말 초당순두부는 뭔가 다른 걸까?
자리를 잡고 앉아 지수에게 물었다.
"아니 여기 순두부는 진짜 맛이 좀 다른가? 사람들 왜 이렇게 많은 거야?"
"나도 안 먹어봐서 모르겠는데그래도 뭔가 좀 다르니까 장사가 잘되는 거 아닐까?"
"순두부가 거기서 거기 아냐?"
우리가 옥신각신 하는 사이 주문을 받으러 왔고 지수는 거리낌 없이 말했다.
"순두부 정식 2인이요."
곧이어 반찬들과 순두부 전골이 나왔다.
빨간 국물에 가득 담긴 순두부와 야채가 보기만 해도 입에 침이 고였다. 반찬으로 나온 코다리 조림도 꽤나 맛있어 보였다.
"일단 반찬은 맛있는데?"
그새 젓가락을 들고 이것저것 먹어 본 지수가 말했다.
"그래? 전골도 끓는다. 거기 그릇 좀 줘봐, 덜어줄게."
그릇에 한가득 순두부 전골을 담아 지수를 주고서 그 애의 반응을 기다렸다.
"어때?"
순두부 전골을 한 숟가락 떠먹은 지수의 대답은 이랬다.
"하.. 뜨거워!"
첫 만남
군대를 다녀오고 스물세 살의 무더운 여름이었다. 복학까지는 시간이 꽤나 많이 남아 뭘 하면서 보낼까 고민하다 그냥 돈이나 벌자 싶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막 전역한 건강한 몸, 남아도는 시간. 이 조건으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은 많았고 그중 시급이 가장 높았던 물류센터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결심했다.
아르바이트 지원을 하고 관리자라는 과장과 면접을 봤다. 군대는 다녀온거 맞냐, 집은 어디냐, 오래 일할 수 있냐, 잘할 자신 있냐, 바로 출근 가능하냐 뭐 이런 잡다한 것들을 물어보고는 순식간에 면접이 끝났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 바로 출근할 수 있느냐는 연락을 받았고 난 내일부터 출근하겠다 대답했다.
근무시간은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힘쓰는 일이라 그런지 시급이 다른 아르바이트 보다 높았고 이렇게 몇 달 일하면 복학 전까지 꽤나 큰돈을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면접을 봤던 과장의 말로는 내 또래 아르바이트 생들이 많아 일하는데도 괜찮을 거라 했다. 나름 기대가 되는 일자리였다.
출근 첫날.
열대야가 전국을 뒤덮고 있는 무더운 날씨로 집에서 나오면서부터 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난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 회사 앞에 있는 커피숍으로 뛰어 들어갔다.
매장으로 들어서자마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를 맞이했다. 휴. 이제야 좀 살만하다 싶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테이크 아웃이요."
결제를 하는 동안 내 뒤에도 그새 줄이 섰다.
"결제됐습니다."
"감사합니다."
결제를 하고 옆으로 나오자 다음 사람의 주문소리가 들렸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 테이크 아웃이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이 더위에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신다고?'
누군가 싶어 고갤 돌려 주문한 사람을 바라봤다.
키는 160이 조금 넘을까? 등까지 내려오는 갈색의 컬이 들어간 긴 머리에 반팔티, 청바지를 입고 커다란 숄더백을 메고 있는 여자. 무엇보다 눈에 들어온 건 동그란 눈과 오똑한 코, 살짝 도톰한 입술이 자리 잡고 있는 하얀 얼굴이었다.
'예쁘다.'
여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들었던 생각이었다.
예쁘긴 하지만 이 불볕더위에 뜨거운 커피라니. 예쁜 여자들은 더위도 안 타는 건가? 회색옷을 입어 몸에서 난 땀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나와는 달라도 너무 달라 보이던 그녀.
그게 나와 지수와의 첫 만남이었다.
푸르른 동해바다
"초당 순두부 괜찮네."
순두부 전골을 먹고 나오며 지수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맛있는데? 역시 줄 서는덴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지수도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가게 에어컨이 돌아가곤 있었지만 사람이 많고 여기저기 전골냄비에서 나오는 열기로 식사시간 내내 더웠는데 그래도 맛있었고 무엇보다 지수가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그럼 이제 바다 보러 가 볼까?"
"민준아, 우리 커피 한 잔 하고 가면 안 돼?"
지수는 카페인 중독이 틀림없다. 하루에도 커피를 3잔 이상은 마신다는 이 녀석. 하긴, 대한민국 직장인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직장에서 즐겁게 일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저 버티기에 급급한 우리에게 카페인마저 허락되지 않는다면 회사에서의 시간이 얼마나 무기력할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왜 안돼? 밥 맛있게 먹었으니 커피도 한 잔 해야지. 가자 커피 마시러."
검색해 보니 해변 근처에 카페가 몇 개 있어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이지수, 설마 너 여기서도 따뜻한 아메리카노?"
"당연하지. 아이스로 마시면 배 아프다고 천 번은 더 얘기한 거 같은데?"
"크크크. 알지 인마.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야."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수에게 확인을 해 본다.
정말 혹시나 해서.
"아메리카노 따뜻한 거 한 잔, 아이스 한 잔이요."
커피가 나오고 우린 나란히 앉아 창밖을 봤다.
강원도 바다는, 동해바다는 정말 바다색이다. 파랗다.
우린 말없이 한 동안 바다를 바라봤다.
파도소리까지 들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좋다."
지수의 이 한 마디는 멍하게 바다를 보고 있는 나를 감싸 듯 낮고 잔잔한 음성으로 다가왔다.
"그러게, 진짜 좋다."
오랜만에 보는 강릉의 이 푸르른 바다도, 너와 함께 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내겐 솜사탕 같은 달콤한 추억으로 남겠지. 너도 그렇기를. 시간이 지나 서로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져도 지금 이 순간은 사진처럼 네 마음속에 남아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