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한국 여자배구의 간판 김연경 선수가 올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여자 배구계의 '메시'로 불리며 한국과 세계무대를 휩쓸었던 월드스타. 언제 또 우리나라에서 이만한 선수가 나올 수 있을까.
요즘 국내 배구리그는 시즌 막바지에 접어들었고 여자부에선 은퇴를 선언한 김연경 선수를 위해 각 팀에서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다. 김연경 선수라서 가능한 얘기겠지.
김선수 소속팀인 흥국생명과 라이벌 현대건설의 올 시즌 마지막 경기가 끝난 뒤 역시나 그녈 위한 이벤트가 열렸고 거기서 김연경 선수는 이런 말을 남겼다.
"연주 언니, 저 먼저 갑니다."
꽃사슴을 아시나요?
연주 언니, 그녀의 이름은 황연주.
키 177cm의 아포짓 스파이커(오른쪽 공격수).
그녀는 현대건설 소속으로 김연경의 중학교, 고등학교 1년 선배이자 여자배구리그 최고참 선수다. 2005년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 2순위로 흥국생명에 입단해 신인시절부터 크게 활약했고 1년 뒤 대형신인 김연경 선수가 같은 팀에 합류하면서 흥국생명은 이후 4 시즌 동안 3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최강팀으로 군림하게 된다.
** 남자부 삼성화재에 신진식, 김세진이 있었다면 여자부 흥국생명엔 김연경, 황연주가 당대 리그 최고의 듀오로 명성을 떨쳤다.
윙 스파이커론 신장이 작은 편이나 가공할 점프력과 운동능력, 특히나 여자부에선 희귀한 왼손잡이라는 점은 그녀에게 큰 장점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황연주 선수는 국내 여자배구 최고 공격수 반열에 올랐다.
(왼손잡이 공격수가 코트 오른쪽에 위치하게 되면 오른손잡이 공격수보다 더 많은 각도를 내 상대코트를 공략할 수 있다. 김세진 선수도 마찬가지였다.)
외모 또한 원조 배구얼짱이라 불릴 만큼 준수해 데뷔 시즌부터 '꽃사슴'이라 불리며 많은 팬들을 몰고 다녔던 그녀.
그러던 중 함께 흥국왕조를 일궜던 김연경 선수가 우여곡절 끝에 해외리그로 떠나자 그녀도 미련 없이 팀을 떠나 지금의 소속팀 현대건설로 이적했다.
내리막길
현대건설로 이적 후 팀 우승을 이끌며 이름값을 했지만 이후 그녀의 실력은 내리막을 걷게 된다. 프로리그 초기 여자부 후위공격은 2점으로 인정해 주는 이상한 룰이 있었는데 황연주는 흥국생명 시절 이 후위공격을 포함, 주 공격수로 팀 내 공격 점유율이 높았고 비시즌엔 국가대표에 소집돼 쉴 틈 없이 혹사를 당했다.
그 결과 한 번도 힘들다는 무릎수술을 무려 다섯 번이나 받게 됐고 나이를 먹어가며 폼이 떨어지자 자연스럽게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웜업존으로 밀려나게 된다. 더 이상 주전선수로 코트에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끝까지 간다
지난 몇 시즌동안 현대건설은 리그 최강팀 중 하나였다. 최근 다섯 시즌을 보면 리그 1위 2회, 챔피언결정전 우승 1회를 차지했는데 올해도 봄배구 진출을 확정하고 또 한 번의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노리고 있다. 하지만 이 시간들 속에서 그녀의 모습을 볼 순 없었다. 언젠가부터 내겐 웜업존에서 동료들을 응원하는 모습이 익숙해져 버린 그녀. 큰 부상이 있는 건 아니지만 더 이상 그녀가 코트에 나설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을 거라 생각됐다.
하지만 그녀는 그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최정상에서 물러난 뒤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자릴 지켰고 그녀는 가끔 찾아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같은 팀 아포짓 포지션의 외국인 선수가 부상이거나 부진할 땐 어김없이 들어와 그 자리를 훌륭히 메꿔줬고 한국 나이로 40이 된 지금도 후위공격을 시도할 만큼 자기 관리가 철저하다.
올 시즌 현대건설이 봄 배구(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 지으면서 남은 경기들을 신인선수 포함, 비주전 선수들로 치르고 있는데 그녀도 이 선수들과 함께 출전하면서 여전히 본인의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다. 예전 같은 파워, 점프력은 사라졌지만 노련한 기술, 경험, 좋은 컨디션으로 황연주라는 선수가 여전히 코트에서 가치가 있다는 걸 매 경기 보여주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면 멋지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진다. 존경심이다.
꽃사슴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경기 중 해설자도 그녀의 모습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한다. 지금 신인선수들과 그녀의 나이 차이를 보면 거의 조카와 이모뻘임에도 전혀 뒤처지지 않는 체력과 실력을 보여준다.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최정상의 자리에서 웜업존으로 밀려났을 때 그녀의 기분은 어땠을까.
이젠 한 물 갔다고, 예전의 황연주가 아니라는 주위의 시선과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을 보며 얼마나 겁이 나고 두려웠을지. 하지만 그녀는 꿋꿋이 버텼다.
살아남기 위해 리시브 연습을 했고(그녀의 포지션인 아포짓은 공격력이 강한 선수들을 위한 자리로 서브 리시브를 하지 않고 바로 공격에 들어가는 자리라 지금은 외국인 선수들이 주로 맡고 있다.) 신인시절부터 줄곧 지적되어 온 수비가 약하다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수비연습도 꾸준히 했다고 한다. 그리고 여전히 여자배구의 기록 제조기로써 코트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가.
인생은 롤러코스터
인생은 누구에게나 롤러코스터와 같다.
좋을 때가 있으면 나쁠 때가 있고 인생의 황금기에 섰다 싶을 때 갑자기 저 밑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중요한 건 그 시련을 어떻게 견디느냐의 문제다.
삶의 밑바닥에서 그냥 포기해 버릴지, 묵묵히 버티고 이겨낼지는 본인의 몫이지만 견뎌낸 사람에겐 분명 그만큼의 보상이 돌아온다는 것을 믿는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꽃사슴의 시간이 이 분명한 진리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