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만나기 전까지 내겐 몇 번의 연애경험이 있었던 것에 반해 아내에겐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 연애상대다. 아내에게 이걸 행운이라고 해야 할까 불운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의 첫 만남은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상에나, 벌써 22년이나 지났다.
2002년에 군 전역을 하고 이듬해 2학년으로 복학을 하게 되면서 이제 막 신입생 티를 벗은 같은 과 후배인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됐다. 내향적이고 낯을 많이 가리는 나와 달리 외향적이고 노는 거 좋아하고 항상 시끌벅적한 무리에 껴 있던 아내.
글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신기한 일이다.
그때의 내가 아내와 연애를 시작한 것도 그렇지만 그렇게 10년을 함께 보내고 결혼까지 하게 되다니. 결혼을 하고도 13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이렇게 될 거라고 그때의 우리가, 주변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난 OK! 넌 NO!!
사람은 경험을 통해 많은 걸 배우게 되는데 연애도 마찬가지다.
첫 연애의 어설픔과 어리숙함은 시간이 지나 몇 번의 만남과 헤어짐을 겪으며 처음보다 익숙해졌고 그 경험은 연애를 하는 가운데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해 줬다. 그런 내가 연애가 처음인 아내를 만났을 때, 내 첫 연애시절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종종 받곤 했다.
잘 싸우고 화해하는 법을 몰라 최대한 참아보려는 모습, 친구들을 두고 어떻게든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는 모습, 내가 여사친과 통화만 해도 신경을 쓰던 모습까지. 내가 첫 연애때 했던 모습들이 아내에게서 보였다.
그중에서 아내와 내가 종종 다투던 문제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남사친, 여사친과의 만남이었다.
난 아내가 남사친들을 만나서 술을 마시든 밥을 먹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내가 친구들과 있을 땐 연락도 거의 하지 않고 나도 나만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하지만 아내는 나와 반대였다.
내가 여사친과 통화만 해도 뾰로통한 표정으로 불편한 심기를 가감 없이 드러냈고 내가 여사친들이 있는 모임에서 밤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지는 날이면 중간중간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를 해서 언제 들어가냐고 묻곤 했다.
이런 성향의 차이는 내겐 왠지 모를 구속으로 느껴져 다툼의 원인이 되곤 했다.
언젠가 아내는 이런 내 모습에 불만을 표시했다.
자신이 친구들과 늦게까지 술을 마시는데 어떻게 그렇게 연락을 안 할 수 있냐고.
난 대답했다.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친구들과 시간 보내고 있는데 방해하기 싫은 거고 무엇보다 널 믿어서라고.
한창 연애중일 때 하루는 아내가 물었다.
친구들과 1박 2일로 여행을 다녀오려는데 가도 되냐고.
난 친구들과 여행 가는데 왜 내 허락을 구하는 거냐고, 다녀오라고 했다.
그랬더니 아내는 여행멤버가 남자 셋, 여자는 본인까지 둘이라고 했다.
물론 나도 다 아는 고등학교 친구들이긴 했다. 하지만 여자가 더 적다 보니 신경이 쓰였는데 잠깐 생각해 보다 아내에게 말했다.
"나한테 물어본다는 건 어차피 가려고 마음먹었다는 거 아냐? 그냥 다녀와."
여행을 다녀온 아내를 만났을 때 그 애가 말했다.
"만약 오빠가 남자 둘에, 여자 셋으로 여행을 간다 했으면 난 절대 허락 안 했을 거야."
(아내가 두 살 연하다.)
그런 아내에게 말했다.
난 널 믿는다고. 그래서 크게 걱정하지 않고 잘 다녀오라 한 거라고. 그런데 만약 네가 내 믿음을 깨는 행동을 했다면 난 미련 없이 너와의 관계를 정리하겠다는 마음이었다고.
믿음, I trust U!
아내는 이제 본인의 인생에서 나와 함께 한 시간이 그렇지 않은 시간보다 길다.
23년이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아내와 나 사이엔 사랑이라는 감정의 밑바탕에 서로에 대한 믿음이라는 단단한 축이 세워졌다. 사소한 문제로 싸우기도 하고 때론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이건 대부분 내가 그랬던 것 같다.) 그건 잠시, 잠깐일 뿐이다.
마흔 중반을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밖에서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잘 땐 아내 곁에 붙어 자는 내가 아내를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은(거짓말 같지만) 시간이 지나며 더 깊어지는 애틋함과 사랑, 그리고 믿음이다.
내 믿음을 깨면 너와의 관계를 정리하려 했다던, 20대의 연인을 향한 치기 어린 내 믿음은 함께 보낸 긴 시간의 힘을 쌓고 쌓아 아내에 대한 깊은 신뢰로 이어졌다. 이게 바로 우릴 더 단단하게 엮어주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