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해진 짧은 머리를
지인들과 연락할 때를 제외하곤 핸드폰을 잘 보지 않던 내가 언젠가부터 웹툰에 푹 빠지게 되면서 폰을 쥐고 있는 시간이 꽤나 길어졌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각 요일별로 챙겨보는 작품만 4~5개씩은 되는 거 같은데 목요일에 보는 웹툰에서 최근 주인공 남녀가 남주의 군입대로 헤어짐을 겪게 되는 내용이 나왔다.
대한민국에 있는 신체 건강한 남자라면 모두 가야 하는 군대. 군입대로 인한 이별은 정말 남 얘기가 아닐 수 없고 나 역시도 같은 일을 겪었기에 웹툰을 보면서 감정이입이 많이 됐었다.
군대에 가는 남자 주인공의 여자 친구는 무려 아이돌 걸그룹 멤버였던 사람이다. 그것도 과거 엄청난 인기를 자랑했던. 지금은 어떤 이유로 조용히 학교만 다니고 있지만 남주는 불안하다. 아니, 남주가 아니더라도 여자 친구가 있는 상황에서 군입대를 해야 하는 남자들은 모두 불안하다. 이 관계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끝나버릴까 봐.
남자가 군대에 가고 처음엔 잘 지내는 듯하던 여자 친구는 1년 후 최악의 이별로 손꼽힌다는 잠수이별을 택하게 된다. 이유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나 역시도 너무나 궁금한데.
이걸 보고 있노라니 자연스레 옛 생각이 떠올랐다.
한창나이 21살에 입대를 하면서 겪게 됐던 나름 슬프고 힘들었던 그 시절.
오래된 기억
집으로 입대 영장이 도착했을 때가 아마도 20살 가을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입대 날짜는 다음 해 4월 4일. 어쩜 날짜도 이 모양이었는지.
당시 동갑의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솔직히 영장을 받았을 때만 해도 시간적인 여유가 많아서였는지 크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겨울방학을 하고 다음 해 1월이 되면서 조금씩 실감이 나기 시작했고 특히나 3월이 되자 내게 주어진 시간이 한 달 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하루하루 지나가는 게 너무 아쉬웠고 그 아쉬운 하루마저도 꽤나 짧게 느껴지곤 했었다.
그런 하루를 마무리하고 여자 친구와 헤어져야 하는 시간은 또 얼마나 싫었던지.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그녀의 집 앞에서 잡고 있던 손을 쉽사리 놓지 못했던 모습이 기억난다.
21살의 어린 나이에 26개월이라는, 끝이 보이지 않는 그 긴 시간 동안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 그리고 여자 친구와 떨어져 홀로 잘 견뎌낼 수 있을지 그때의 난 너무도 자신이 없었다.
라떼는 말이야
내가 입대를 했을 땐 지금과는 환경이 많이 달랐다. 무엇보다 복무기간이 좀 길었는데 지금은 육군 기준 18개월(1년 6개월)로 알고 있지만 난 26개월, 즉 2년 2개월을 복무해야 했고 월급도 지금과는 꽤나 차이가 났다. 지금은 병장이 거의 60만 원 정도 받는다고 하는데 난 이등병 때 월급이 9,900원이었고 병장이 되어서도 2만 3천 원 정도 받았었다. 최저시급? 그 당시엔 그런 걸 얘기할 만한 시대적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군대 문화 자체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입대 후 6주간의 신병교육대 기간은 편지 외에 그 어떤 방법으로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 모습이나 소식을 전할 수 없었고(가족도 마찬가지로 백일휴가 전까진 내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자대로 배치받고서야 고참의 인솔 하에 공중전화로 바깥사람들의 목소리를 처음 들을 수 있었다.
그것도 부대에 공중전화가 많지 않아서 한 번 통화하려면 또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는데 그 긴 기다림의 시간 끝에 전화로 목소릴 들을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5분 남짓. 조금만 더 길어지면 등 뒤 아저씨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곤 했다.
지금은 일과시간 이후엔 핸드폰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데 내가 입대를 했던 2000년엔 핸드폰(그땐 PCS라 했었다.)이 이제 막 대중화되던 시기였고 지금처럼 온라인 공간이 활성화되기 한참 전이었다. 그랬기에 군대 안에서 사람들과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은 공중전화와 편지, 딱 이 두 가지뿐이었다.
컬렉트 콜을 아시나요
공중전화를 사용하기 위해 부모님이나 친구들에게 기회가 날 때마다 전화카드 좀 보내달라고 그렇게나 부탁을 했었다. 지금으로선 정말 상상이 안 되는 모습이다. 다들 전화카드를 하나씩 들고 공중전화에 길게 줄을 선 모습이라니. 전화카드가 없을 땐 종종 수신자 부담(컬렉트콜)으로 전화를 걸곤 했었는데 공중전화를 사용해 본 지가 너무 오래돼서 지금도 수신자부담으로 전화를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수신자 부담으로 전화를 하려면 먼저 공중전화의 빨간색 비상통화 버튼을 누르고 수신자부담 서비스 번호를 누른 뒤 전화받을 사람의 번호를 누르면 신호가 간다. 상대방이 받으면 잠깐 상대에게 내 목소리를 들려주는 시간이 있는데 이때 상대방은 목소릴 듣고 전화를 받을지 말지 선택할 수 있다.
친한 친구들은 종종 내 목소리를 확인하고는 가차 없이 바로 전화를 끊어버리는 적도 많았는데 나 역시도 전역 후 늦게 입대한 이 친구들이 수신자 부담으로 전화를 걸어올 때면 보란 듯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전활 끊어버리곤 했다.
일말상초
군대에는 '일말상초'라는 말이 있다.
'일병 말 상병 초'라는 뜻으로 대부분의 커플들이 이 시기에 헤어지곤 했었는데 나 역시도 그랬다.
입대 초반엔 하루가 멀다 하고 여자 친구의 편지가 날아들었고 짧은 통화를 하면서도 참 애틋했는데 언젠가부터 그녀의 편지와 면회는 뜸해지고 내 전화를 받는 그녀의 목소리에서도 조금씩 반가움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던가. 나는 그렇게 안될 거라고 자신했었는데 20대 초반의 커플이 감당하기엔 둘 사이의 거리는 너무도 멀었다.
그땐 여자 친구를 이해하지 못했다.
철창만 없을 뿐 감옥처럼 날 가둬버린 공간, 매일 반복되는 시간, 같은 사람들 그리고 무엇하나 내 뜻대로 자유롭게 할 수 없는 나에 비해 그녀에게는 가족이 있었고, 친구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나는 여자 친구의 힘듦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내 앞의 힘든 상황만 눈에 들어왔을 뿐, 남겨진 그녀의 시간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게 맞는 것 같다.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힘들게 하는 건지, 뭐가 그렇게 힘들다 말하는 건지 그때의 난 이해할 수 없었다.
헤어짐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던 헤어짐의 시간이 우리 둘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았을 때 다행히도 난 이별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여기 까지라는 건 이미 서로 알고 있었으니까. 먼저 이별을 말하기엔 나는 겁이 났고 그녀는 미안했을 뿐이다. 물론 그 상황이 억울하긴 했다. '내가 군대에 오지 않았다면 과연 이렇게 헤어지게 됐을까?'라는 생각이 항상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고 설사 다른 이유로 헤어지게 된다 해도 밖에 있었다면 충분히 그녀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눠볼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군대에 있는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받지 않는 전화를 걸어보거나 편지로 답답한 마음을 전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그렇게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맞이하는 이별은 22살의 나에게 참 낯설었다. 마지막 인사라도 제대로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해 가을 휴가를 나와 마지막으로 그녀를 한 번 볼 수 있었는데 그때도 하고 싶었던 얘긴 하나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잘 지내라는, 너무도 진부한 마지막 인사만 건네고 헤어졌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후론 그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까.
오랜 시간 뒤에
그녀를 이해하기까진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헤어진 후 애써 그 애와의 시간들을 떠올려보진 않았는데 전역을 하고 어느 날 집에서 필요 없는 물건들을 정리하다 그녀와 관계된 것들을 마주하게 됐다. 그리고 한 번쯤은 확실한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아 지난 시간을 되짚어 봤는데 그제서야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하루아침에 일상이 뒤바뀌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매일매일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던 나와 평소와 다름없는 똑같은 일상에 나만 쏙 빠진 채 홀로 남겨진 그녀 중 누가 더 힘들었을까. 난 왜 그녀가 나를 기다리는 게 그리 힘든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하루아침에 내가 사라져 버린 일상이 그녀에겐 얼마나 힘든 시간들이었을지 그때 난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나만 힘든 거라는 마음뿐이었으니까. 그렇게 내 힘듦만 생각하느라 그녀가 느꼈을 허전함을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보지 못했다.
물론 헤어지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는 군대가 아니었어도 다른 문제로 결국 헤어졌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내가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면 우리의 마지막이 조금은 더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와 아쉬움이 많이 남았더랬다.
해피엔딩
웹툰의 남자 주인공도 내가 이별 후 한참이 지난 후에야 느꼈던 이 미안한 마음을 똑같이 느끼게 된다. 웹툰 작가님은 여자분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남자의 마음을 잘 표현하셨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과거의 나와는 달리 웹툰의 남주는 헤어진 여자 친구와 다시 얽히게 되는 내용으로 전개가 되는 듯한데 그래서 더 궁금하다. 이별을 택했던 여자 친구의 마음은 어땠었는지,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1주일의 기다림이 살짝 길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두 사람이 어떤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지 한 번 지켜봐 볼 테다.
물론 해피엔딩이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