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선생이다』 를 읽고 황현산
이 책은 문학평론가이자 불문학자이신 황현산 선생이 여기저기 발표한 글을 2013년 묶어 출판한 수필집이다. 책의 제목을 보고 실제로 밤새워 일하고 새벽에 잠드는 선생님의 생활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특히 아침잠이 많은 내가 공감했던 부분은 ‘돌덩이의 폭력’에서 합법적인 고성방가인 새마을 운동 노래가 심야 노동자, 밤잠 설친 병상의 환자, 그리고 나 같은 올빼미형 인간에게는 고문에 가까운 폭력이었을 거란 부분이었다. 이는 아무리 좋은 취지로 하는 일이라도 획일적 사회에서 휘두르는 일방적인, 나 같은 사람에게는 가히 절망적이라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얘기를 평이한 용어와 유려한 문체로 명쾌하게 전해주는 선생의 글은 조용한 울림이 되어 내게 전해졌다.
1부를 읽으면서는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이규태 칼럼>이 생각났다. 1980년대 유명했던 칼럼으로 기억된다. 작은 지면에서 이규태 선생은 자신의 박학다식한 모든 면모를 보여주었다. 1990년대의 황현산 선생도 그에 못지않았음을 이 책을 보며 알게 되었다. 시기적으로 나의 1990년대는 결혼과 출산으로 이어지는 문화적 암흑기로 불리는 시기였으므로 모든 사람이 아는 커다란 이슈 아니면 신문에 무엇이 났는지 관심 밖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 글을 보면 당시로는 첨예한 사건들을 조곤조곤한 낮은 목소리로 조목조목 말해주고 있다. 예를 들면 <내가 믿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에서 중학교 때 옆집 청년은 선량한 사람이었는데 군대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어떤 연유인지 그 군인은 탈영병이라는 불명예를 쓰고 부모들은 죄인처럼 살아야 했다고 하는 내용에서
‘오랫동안 잊고 살아온 일들인데 요즘 잠자리에서 깨어나 눈을 뜨면 문득 그 사람들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한숨을 뱉게 된다.’
시를 공부하고 강의하시는 분이라서인지 논리적이면서도 감성적인 글쓰기가 적절히 어우러져 있어 딱딱하지 않아서 좋았다. 편안한 인문학적인 수필을 읽는 감성을 시종일관 느낄 수 있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2부에서 보이는 사진작가의 작품을 읽어내는 글들이었다. 사진보다 더 정교한 글을 만나면서 읽는 내내 입을 다물지 못하고 감탄사가 저절로 연발되었다. 우리가 글쓰기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설명 아닌 묘사라는 것을 귀가 아프도록 들었지만, 어느 순간 설명이 되는 글 앞에 절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황 선생님의 사진 설명은 사진 너머의 모습까지 묘사하고 있어 선생의 사색이 깊이가 어느 만큼일까, 일개 서생인 나로서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전원일기>에서 구본창의 사진을 보면서 읊조린다.
‘나처럼 아마추어 축에도 들지 못하는 사람의 손에 누가 카메라를 쥐여주었다면 애써 피하려 했을 것들로만 사진은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졸고 있다고 생각한 남자는 정말 졸고 있는 것일까. 책을 읽거나 낡은 연장을 손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도를 하는 것은 아닐까. 그가 손전화로 문자를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가 꿈속에 있건 현실에 있건 그는 골똘하다. 그의 머리는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 있다. 눈 한번 여겨본 적 없이 늘 지나치기만 했던 현실의 깊이가 그만하다.’
사진에서 우리가 읽어내지 못하는 깊이를 조용한 목소리로 말해준다. 생각지도 못한 생각의 확장에 독자인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찌푸린 사람들>에서는 강운구의 사진을 보며 선생이 대학교 3학년 때 갔던 태백시의 황지를 묘사한 글을 보면 어떤 에세이스트의 글보다 탁월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고 낮은 집들도 포장이 안 된 도로도 모두 시커멓게 탄가루를 둘러쓰고 있었다. 마을을 둘러싼 솔밭에서는 길고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렸다. 검은 길바닥에는 함부로 버린 개숫물이 얼어붙어 있고, 거기 함께 얼어 있는 밥풀을 떼어먹으려는 듯 역시 탄가루를 둘러쓴 여윈 개들이 안타까운 혀로 검은 얼음을 핥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적막하고 적막한 만큼 아름다웠다. 어둡도록 검은 풍경과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새파랗고 햇빛은 이상하게 찬란했다. 나는 춥고 배가 고팠지만, 마음은 어느 때보다도 더 고양되었었다. 아마도 인간에게 전혀 호의를 내보이지 않는 자연, 날카롭게 날이 선 돌과 바람과 흙에 자기 육체를 직접 부딪치고 사는 그런 삶의 개념을 그 풍경 속에서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 자신의 조잡한 표현력에 깊은 절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글쓰기를 공부하면서 재능 없음에 느끼는 나의 감정은 절망에 가깝다. 이런 글을 만나면 나도 해야지 하는 용기보다 풀이 죽어버린다. 그래도 좋은 글을 만나는 기쁨에 나의 절망을 상쇄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3부에 오면 잔잔한 에세이의 특성이 오롯이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의 글은 더욱 말랑해진다. 제목이 주는 뉘앙스부터 다르다. <먹는 정성 만드는 정성> <헌책방이 있었다><협객은 날아가고 벼는 익는다> <11월 예찬> <산에는 산새 물에는 물새> 다 나열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글들이 나를 유혹했다. 유난히도 나는 11월의 글을 좋아한다. 계절 중 가을도 아닌 것이 겨울도 아닌 게다가 음산하고 을씨년스러운 축축한 같은 것들이 주는 우울감이 다른 어떤 계절보다 나를 끌어당겨서다.
‘이제 황제는 없다. 그러나 주목하는 사람이 없어도 11월은 있다. 나무들은 그 순결한 등허리의 선을 드러내고, 새들은 그 맑은 생명을 뭉쳐 붉은 열매를 쫀다.’
이상하고 볼품없는 나무들은 순결함으로 표현되고 이제 겨울을 맞이해야 하는 새들은 맑은 생명이 된다. 어디에도 허무하거나 쓸쓸함이 없는 11월의 발상에 박수를 보낸다.
마지막으로 <은밀한 시간>에서 보여주는 모든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라는 시간에 관해 이야기한다. 나는 이런 자유로움을 미국에 한 달 정도 체류하면서 느꼈다. 나를 전혀 모르는 타인들 속에서, 나를 전혀 의식지 않는 시선들 속에서 진정한 편안함과 자유로움을 느꼈었다.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 누구에게나 은밀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선생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추천하고 싶다.
‘나는 누구나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시간을, 다시 말해서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남이 모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략-
그렇게 해서 늘 되풀이되는 생활에 활력을 얻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다. 여름날 왕성한 힘을 자랑하는 호박 순도 계속 지켜만 보고 있으면 어느 틈에 자랄 것이며, 폭죽처럼 타오르는 꽃이라 한들 감시하는 시선 앞에서 무슨 흥이 나겠는가. 모든 것이 은밀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단지 제목이 좋아서 선택한 책이었다. 읽어보니 편안하면서 일상적이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글이었다. 글을 쓰고자 하는 나에게 필독의 지침서가 되었을 정도로 좋은 책을 만났다. 글에 입문하거나 글을 쓰고자 하는 분들에게 필독서로 꼭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