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플랜맨 Oct 06. 2018

마리오, 더 이상 그대의 편에 설 수 없다

어른이 된다는 것, 그 기준에 대하여

둘리보다 고길동 아저씨가 불쌍해지면, 너도 어른이 되는 거란다. 어느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우스갯소리로 돌았던 이야기였다. 만화 <아기공룡 둘리>에서 고길동은 주인공인 둘리와 그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매일 야단만 치던 어른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보살'이 아닐 수 없다. 녹색의 공룡을 거둬준 것은 물론이고, 깐따삐야 별에서 온 외계인과 말하는 타조, 라스베이거스 무대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 꿈인 마이클 잭슨의 친척까지. 심지어 희동이는 부모에게 사정이 있어 고길동이 대신 맡아주고 있던 것이라고 하니, 그의 넓은 이해심은 어디까지일까. 그런데, 이들은 고길동의 집을 두 번이나 날려먹고 그가 아끼던 낚싯대와 레코드판까지 박살을 낸다. 서울 한복판에 마당 딸린 2층 집을 갖고 있고 월급의 몇 배나 되는 도자기가 박살 났음에도 잠깐 화만 내고 넘어갈 정도의 재력은 둘째 치더라도, 나라면 저 사고뭉치들을 받아들이지는 못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사실 추억 속의 고길동을 소환한 것은, 얼마 전 아내와 함께 한 게임 때문이다. 슈퍼마리오 오디세이. 스토리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이야기 그대로이다. 배관공인 마리오가 악당 쿠파에게 납치당한 피치 공주를 구하기 위해 떠나는 모험 말이다. 어렸을 때의 우리는 마리오에게 '착한 주인공'이라는 카드를, 쿠파에게는 '악당'이라는 카드를 주었다. 마리오가 사랑하는 피치공주를 쿠파가 납치했으니, 그녀를 구해낸 이후 당연히 공주의 선택은 마리오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피치공주는 아무런 카드도 받지 못한 조연이었고, 그녀의 선택지는 자신을 구해 낸 '착한 주인공' 마리오 외에는 없었다.


이번 게임의 스토리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우리의 관점은 확연히 달라졌다. 쿠파는 피치공주를 납치해 하나씩 하나씩 결혼 준비를 해 나간다. 모자왕국에서 티아라를, 사막왕국에서 다이아 반지, 호수왕국에서 웨딩드레스, 숲왕국에서 부케, 얼음왕국에서 케이크, 요리왕국에서 피로연 음식을 마련했고 심지어 달에 결혼식장을 잡았으니 이 얼마나 로맨티시스트인가! 게임 스토리가 중반을 지날 무렵, 아내의 한 마디. "저 정도면, 쿠파한테 보내줘야 되는 거 아냐?" 맞는 말이다. 우리도 결혼 준비를 하면서 최대한 간소화하면서 불필요한 것은 쳐내서 진행했음에도 신경 쓸 것이 적지 않았는데, 저 정도로 앞장서서 공주를 위해 헌신한다면 그녀를 향한 쿠파의 사랑은 충분히 증명된 셈이었다. (물론, 이 결혼 준비가 공주를 납치한 것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애초에 글러먹은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게임 후반, 마리오는 달 왕국의 결혼식장으로 피치공주를 구하기 위해 떠난다. 그리고는, 결혼식장 문을 박차고 당당하게 들어선다. 그런데, 그의 옷이 이상하다. 하얀색 턱시도? 나와 아내는 둘 다 터지는 웃음을 막을 수 없었다. "아무리 게임이지만, 이건 너무 비매너 아냐?" 납치당한 공주를 구하고 자신의 사랑을 되찾겠다는 그의 본심은 이해하지만, 쿠파가 차려놓은 결혼식장에 밥 숟가락만 얹겠다는 저 파렴치한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둘의 결투 중에 결혼식장은 박살나버리고, 마리오와 쿠파는 피치공주에게 경쟁하듯 꽃다발을 내밀며 마지막 선택을 강요한다. 여기서 피치공주는 살짝 짜증 섞인 얼굴로 선택을 거부하고 몸을 돌렸다. 그래,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납치 당해 결혼식장까지 끌려갔다가 겨우 빠져나왔는데 운명의 남자를 단 두 명 중에 골라야 한다니. 선택지는 마리오와 쿠파 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아무도 선택하지 않을 권리도 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슈퍼마리오 오딧세이


그렇게 오디세이호에 몸을 실은 피치공주는 갑자기 뒤돌아, 망연자실한 마리오와 쿠파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싱긋 웃으며 누군가를 부른다. 나는 이 순간을 '피치공주의 어장관리'라고 표현했고, 아내는 '피치공주가 여시 짓을 한다'라고 말했다. 오디세이호는 달 표면을 딛고 날아오르고, 피치공주의 미소에 홀린 둘은 또다시 필사적으로 오디세이호를 향해 몸을 던졌다. 쿠파의 머리를 밟고 오디세이호에 올라탄 마리오의 승리.

 

@슈퍼마리오 오딧세이


아니, 과연 승리일까. 피치공주가 부른 마지막 사람은 누구였을까. 아마 마리오도, 쿠파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둘 다 오디세이호를 향해 서로 밀치며 몸을 던지진 않았겠지. 먼저 타는 사람에게 나와 데이트할 수 있는 기회를 줄게, 일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쿠파를 확실하게 거절하지도, 마리오를 선택하지도 않았다. 아마 그 둘은 영원히 피치공주를 납치하고 구해내면서 주변을 맴돌 것이다. 결국, 최후의 승자는 피치공주가 되겠지.


마리오와 쿠파가 둘 다 안쓰러워 보인다면, 피치공주의 선택은 존중하지만 여시로 보인다면,

당신도 이제 어른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