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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랜맨 Oct 07. 2018

여행: 여기서 행복할 것

지금까지 내가 했던 여행은, 여행이 아니었을까

갑자기 휴가 일정을 취합하겠다고 했다. 가급적이면 7,8월에 모두 휴가를 다녀와서 9월부터는 업무에 집중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강요하는 건 아니라는 말을 덧붙였다. 휴가라도 마음 편하게 쓰고 싶을 때 쓰면 안 되냐고 한참을 툴툴거리다가 달력을 펼쳤다. 공휴일과 붙여 써서 더 오랫동안 쉬고 싶은데, 사람도 많을 것 같고 항공권 가격도 비쌀 것 같아 포기했다. 계절도 좋고 날씨도 좋을 것 같고 사람은 덜 북적이면서 항공권 가격과 숙소 가격이 저렴한 시기를 찾아보지만 있을 리가 없다. 팀장님의 휴가 일정을 확인하고, 바로 그다음 주로 일정을 잡았다. 이 정도면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 정도는 되는 것 같다고 다독이며.


기껏 휴가를 내는데 어디 멀리 떠나지 않으면 왠지 손해 보는 기분이 들기 마련이다. 이번에야말로 호주를 가볼까 생각했다. 아차, 8월이면 거긴 한겨울이겠구나 그럼 탈락. 유럽을 가기에 일주일은 너무 짧아서 왠지 비행기 값이 아깝다. 일본이나 가야겠다 결론을 내렸다. 삿포로가 시원하다던데, 마침 맥주축제도 한다네. 다녀와서 회사 출근하기 전에 이틀 정도는 쉬어야 하니까, 3박 4일 정도 잡으면 되겠다. 항공권을 알아봤다. 가격이 싸다 싶은 건 여기서 오후 늦게 출발해서 저녁 즈음에야 삿포로에 도착하는 비행기였다. 소중한 내 휴가를 이렇게 낭비할 수는 없지 싶어서, 조금 비싸더라도 새벽에 출발하는 비행기표를 선택했다. 어차피 여행 가면 하루 종일 밖에서 돌아다니니 비싼 호텔은 필요 없다. 여기저기 다니기 좋고, 지하철역이 가까운 3성급 호텔을 잡았다. 이후 몇 주간 여행책과 블로그를 넘나들며 구글맵에 별표를 쳤다. 내가 언제 또 삿포로를 가보겠어, 기왕 가는 거 이건 꼭 봐야지, 다들 맛있다던데 이건 먹어봐야지, 이렇게 몇 권의 여행책과 블로그 내용이 합쳐진 나만의 여행 계획이 만들어졌다. 어느덧 여행 전날, 휴가 기안을 올렸다. 날짜를 선택하고 몇몇 추가 항목을 입력했다. 휴가지: 일본 삿포로, 휴가 사유: 리프레쉬.


삿포로역에 내려서 숙소까지 가는 길에 유명하다는 식당에 들렀다. 메뉴판을 보는 척만 하고 우니동을 주문했다. 어차피 메뉴는 한국에서부터 정해온 터였다. 숙소에 짐을 풀고 곧장 동물원을 가기로 했고, 그 이후에는 근처 장어구이집을 들렀다가 맥주축제를 가야 했다. 가야 할 곳이 많았고 일정은 촉박했다. 잠시 후 손바닥만 한 그릇에 우니동이 담겨 나왔다. 둘이 합쳐서 10만 원이 넘는데 겨우 이만큼인가 싶었다가, 한국에서 먹으려면 더 비싸다는 블로그 글이 생각나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오늘 하루 종일 먹어야 할 게 많으니까 양이 적어서 다행이라며 합리화했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가는 길, 아내에게 식사가 어땠는지 물었다. "맛있었어, 근데 생각했던 것만큼은 아니네."



언제부턴가 나의 여행은 이런 식이었다. 내가 원하던 때에 떠날 수 없었고,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없었다. 지친 몸과 마음을 비워내기 위해 여행을 떠나면서도, 여행에서 돌아온 뒤 몸을 추스르고 다시 일할 준비를 하기 위해 또 다른 휴식시간을 필요로 했다.  나만의 여행 계획을 세웠다며 뿌듯해했지만 어떤 TV 방송에서 나왔던 해변, 어느 여행책에서 봤던 성당,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찾은 식당들 뿐이었다. 다른 사람이 경험하고 보고 먹은 것들을 똑같이 따라 하고, 한줄평을 다는 것에 불과했다.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든 채, 시선은 구글맵에 고정시키고 별에서 또 다른 별로 옮겨 다녔을 뿐이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쳤을까.


김민철 작가의 <모든 요일의 여행>에서는 여행을 '여기서 행복할 것'의 줄임말이라고 표현했다. 정말 그것이 여행이라면, 내가 갔던 여행은 여행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싱가포르에서 갑자기 내린 스콜에 쫄딱 젖은 채 마을을 한 바퀴 빙- 돌다가 겨우 찾은 식당에서 페퍼 크랩을 입에 넣던 순간. 하와이 와이키키에서 하나우마베이까지 호기롭게 자전거를 빌려 타고 나섰다가 2시간 동안 죽음의 레이스를 펼치고, 정작 바닷가에 도착해서는 잠들어버렸던 순간. 경유지였던 홍콩에서 하루 종일 더위에 찌들어있다가 다시 13시간의 비행을 앞두고 겨우 20분에 3만 원이나 내고 들어간 공항 샤워실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던 순간. 바르셀로나에서 롤레아 샹그리아 한 병을 들고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며 고딕지구의 좁은 골목길을 걷던 순간.


그 순간들은 여행책에 쓰여 있던 것도, 그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본 것도, 미리 계획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오히려 계획하지 않았던 일이어서 즐거웠고, 지금도 아내와 맥주 한 잔 할 때 안주거리가 되는 소중한 기억이 되어 반짝 빛난다. 그래, 그 순간은 분명 행복했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정말 여행을 하고 있었다.


다시 그런 여행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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