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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랜맨 Jun 28. 2020

올바른 방향으로, 있는 힘껏

<피프티 피플>, 정세랑  |  06/18~22  |  낫저스트북스

50명. 정확히는 51명 그 이상. 서로 다른 이야기를 마치 각각의 짧은 단편 소설처럼 엮어낸 작품.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의 사연이나 성소수자의 시선, 청년 실업과 노년 일자리 문제, 층간소음 문제와 싱크홀 추락사고, 빗길 과적 화물차량의 교통사고, 취업 잘되고 인기 많은 학과만 남기려는 대학교의 학과 통폐합 이슈, 낙태와 피임, 직장과 군대의 부조리한 서열 문화 등. 등장인물들 각자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와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그러면서도 이 사람과 저 사람은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고, 본인의 생각을 가감 없이 드러내기도 꽁꽁 숨기기도 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모습우리네 삶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병원을 주요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몸과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의 더 극적인 이야기가 묘사되긴 하지만, 책상 앞에 앉아서 일하는 이들이라고 상처가 없을까.


책을 모두 읽고 나서 자연스럽게 커다란 종이를 꺼내 펼쳤다. 수차례 썼다 지웠다를 반복해야 할 것을 알기에 부드러운 지우개와 옅고 단단한 심도의 뾰족하게 깎은 연필도 함께 꺼냈다. 다시 책의 첫 장을 펼치고, 종이에 등장인물의 이름을 썼다. 바로 아래에는 그의 삶을 한두 줄로 간략하게 요약했다. 그리고 다음에 등장하는 인물도, 그다음 인물도... 그러다 보면 이 사람과 저 사람이 연결된다. 부부나 모녀, 자매와 같은 가족이거나 직장동료처럼 비교적 그 연결고리가 명확한 경우도 있지만, 말 그대로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었다거나 건너 건너 아는 사이인 경우도 허다하다. 처음 읽을 때보다 두 번째 다시 읽으니 숨겨졌던 관계들이 더욱 많이 드러나는 듯했다. 그렇게 종이를 가득 채우고, 노트북으로 옮겨 담았다.


이렇게 소설을 읽고 다시 한번 읽으며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정리하고 나니, 두껍지 않은 책 한 권의 많지 않은 등장인물을 접하면서도 그중 호감이 가는 사람과 거부감이 드는 사람이 자연스레 나뉘게 된다. 특히 내 기억에 남는 매력적인 캐릭터는 진선미와 이호다. 진선미는 모든 일을 가볍게 만드는 재주가 있으면서도 본인이 처한 부조리한 상황을 정면 돌파하고 딸이 가진 고민의 본질을 꿰뚫는 '웃으면서 성공하는 사람'이다. 이호는 여든의 나이에 상당한 성취를 이루었음에도 그것들을 단지 운이 좋았다고 말하며, 본인보다 어리거나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는 한 없이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추려 하는 사람이다. 이 둘은 모두 주변의 사람들을 편견 없이 대하고 그들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낸다.


이쯤 되면 이제 관심은 나와 내 주변 사람들로 옮겨가게 된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록되고 기억될까? 우리가 하는 일은 마치 돌을 멀리 던지는 것과 같다고 하던데. 가끔씩은 한 번 멈춰서 내 삶을 두세 장의 짧은 글로 요약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객관적인 관점에서 나 자신을 보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몸을 향하고 있는지, 정말 있는 힘껏 돌을 던지고 있는 건지 정도는 알아야 될 테니까.

 




"우리가 하는 일이 돌을 멀리 던지는 거라고 생각합시다. 어떻게든 한껏 멀리. 개개인은 착각을 하지요.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사람의 능력이란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돌이 멀리 나가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사실은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시대란 게, 세대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소 선생은 시작선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내 세대와 우리의 중간 세대가 던지고 던져서 그 돌이 떨어진 지점에서 다시 주워 던지고 있는 겁니다. 내 말 이해합니까?"

"릴레이 같은 거란 말씀이시죠?"

"그겁니다. 여전히 훌륭한 학생이군요. 물론 자꾸 잊을 겁니다. 가끔 미친 자가 나타나 그 돌을 반대 방향으로 던지기도 하겠죠. 그럼 화가 날 거야. 하지만 조금만 멀리 떨어져서 조금만 긴 시간을 가지고 볼 기회가 운 좋게 소 선생에게 주어진다면, 이를테면 40년쯤 후에 내 나이가 되어 돌아본다면 돌은 멀리 갔을 겁니다. 그리고 그 돌이 떨어진 풀숲을 소 선생 다음 사람이 뒤져 다시 던질 겁니다. 소 선생이 던질 수 없던 거리까지."

"선생님이 말씀하시니까 정말 그럴 것 같습니다."

"모르겠어요. 내 견해일 뿐이지만, 나이 들어 물렁해진 건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나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당연히 스트레스를 받지요. 당사자니까, 끄트머리에 서 있으니까. 그래도 오만해지지 맙시다. 아무리 젊어도 그다음 세대는 옵니다. 어차피 우리는 다 징검다리일 뿐이에요. 그러니까 하는 데까지만 하면 돼요. 후회 없이."

(p.380)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낮고 넓은 테이블에, 조각 수가 많은 퍼즐을 쏟아두고 오래오래 맞추고 싶습니다. 가을도 겨울도 그러기에 좋은 계절인 것 같아요. 그렇게 맞추다 보면 거의 백색에 가까운 하늘색 조각들만 끝에 남을 때가 잦습니다. 사람의 얼굴이 들어 있거나, 물체의 명확한 윤곽선이 보이거나, 강렬한 색상이 있는 조각은 제자리를 찾기 쉬운데 희미한 하늘색 조각들은 어렵습니다. 그런 조각들을 쥐었을 때 문득 주인공이 없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면 모두가 주인공이라 주인공이 50명쯤 되는 소설, 한 사람 한 사람은 미색밖에 띠지 않는다 해도 나란히 나란히 자리를 찾아가는 그런 이야기를요.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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