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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랜맨 Jul 20. 2020

도선생을 아십니까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도제희 | 07/06~08 | 프루스트의서재

나는 고전문학을 좋아하지 않는다. 전 세계 사람들에게 수백 년간 사랑받는 이유가 있음은 분명하겠지만, 시대도 배경도 다른 그 이야기가 나에게는 쉽게 와 닿지 않는다. 특히 외국 고전문학은 더욱 그렇다. 등장인물이나 지역의 복잡한 이름은 둘째 치더라도, 이미 충분히 난해하고 복잡한 문장이 번역까지 거치고 나면 도저히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문체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한 점에서 러시아 문학, 그중에서도 도스토옙스키의 책은 당연히 나와는 맞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아내는 고전문학을 좋아한다. 제법 두툼한 책들도 한 번 집중하면 순식간에 읽어나간다. 나와는 정반대로 오히려 요즘의 책들을 읽기 힘들어한다. 현재의 삶에서 벗어나 잠시 다른 세상으로 여행 가듯 책을 읽는데, 그 배경이 너무 현실과 가깝거나 겹쳐져있다면 주인공의 고통을 함께 겪는 것 같아 힘들다고 했다. 현대문학이 담고 있는 어두운 현실과 사회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현재 진행형이니까. 반면 고전문학은 지금과 확연히 다른 배경 덕에, 등장인물의 감정 하나하나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도스토옙스키는 가장 읽기 어려운 존재였다. 그럼에도 도전의식이 샘솟은 건지 한 동네 책방을 찾아 골라든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한두 달 정도 지났을까. 이번 주에는 무엇을 읽을까 고민하다 책장에 꽂혀있던 이 책을 꺼내 들어 프롤로그를 훑어보았다. 어렵게 재취업한 회사를 박차고 나왔는데, 오랜만에 도스토옙스키가 읽고 싶어 졌다고 했다. 에이, 이건 너무 허세 부리는 것 아닌가 싶었지만 뒷 이야기가 궁금해 시선을 옮겼다. 부잣집 아이들에게 영어 회화 과외를 하고 옥탑방으로 퇴근하던 스물세 살의 그녀는, 무려 도스토옙스키를 읽는 자신에게 과외 따위는 생계 수단일 뿐이라고 정신 승리를 하려 했고 그 마저도 내 일이 떳떳하지 않다는 이유로 석 달만에 그만두었다고 했다. 그로부터 15년 뒤, 반년도 채 다니지 못한 한 회사를 그만두고서야 도스토옙스키를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이다. 결국 이 책은 불안정한 시기의 그녀가 도스토옙스키부터 얻은 공감과 위로이며, 눈으로만 따라가던 독서에서 경험과 마음으로 이해하는 독서로 변모한 15년간의 이야기인 셈이다.


책은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미성년>, <죄와 벌>, <백치>,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등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의 등장인물과 줄거리를 간략하게 설명하며 몇몇 구절이나 문단은 원작을 인용하여 보여준다. 하지만, 이 책의 매력은 단순히 도스토옙스키의 글을 소개하는 데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녀는 도스토옙스키의 글을 포함한 고전문학이 고상하고 우아하고 품격 있는 것보다는 신파와 막장을 담은 이야기라고 치부한다. 그래서 오히려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시대를 관통하는 명작에서도 인간이 이렇게 나약하고 비겁하고 부족한 존재로 묘사되는데, 나라고 다를 바 없을 것이고, 내가 이 세상을 살면서 힘든 건 당연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생생한 경험에 도스토옙스키의 글을 얹어낸다. 누군가의 가족이고 친구이며, 직장인이고 세입자인 본인의 위치에서 겪은 이야기들. 그 각각의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은 무엇이었을지 어떻게 행동했어야 더 나았을지를 고민하고, 소설 속 인물을 빗대어 생각해보는 시간. 그렇게 200년 전의 글은 현실의 문제로 확- 다가오게 되었고, 내가 고전문학을 좋아하지 않던 이유는 사라져 버렸다.


누군가 나에게 이제는 도스토옙스키의 책을 읽을 생각이 생겼냐고 묻는다면, 여전히 내 대답은 No다. 이 책에 인용된 한두 문단씩의 원문을 읽는 데에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몇 번씩 다시 되돌아가곤 했으니, 하룻밤 이야기를 천 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풀어내는 그의 책을 읽을 자신은 여전히 없다. 하지만 이 책처럼 고전문학과 현실의 삶을 조화롭게 풀어낸 글이 있다면 얼마든지 읽을 것이다. 도제희 작가는 적어도 나에게는 도스토옙스키의 책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 훌륭한 번역가이자, 즐거운 경험을 전달하는 스토리텔러의 역할을 충분히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도스토옙스키와 도제희 작가, 둘이 같은 도 씨 성을 가진 것은 우연일까?




"도덕이란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단 말입니다! 제게는 제가 먹을 빵도 있습니다. 사실 평범한 빵 한 조각이지만, 가끔은 말라비틀어진 빵 한 조각이지만, 제 노동의 대가로 구한 빵입니다. 먹는 데 아무런 법적 하자가 없는 저만의 빵이란 말입니다."

... 중략 ...

어제도, 오늘도 많은 세입자가 부당한 상황에 직면하거나, 초라한 공간에서 남루한 감정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고시원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닭장 같은 원룸에서 힘든 하루의 피로를 풀고, 지하의 습한 공기를 견디고, 옥탑방의 더위와 추위를 견디면서 불안한 앞날 걱정에 시름에 빠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 방은 당신의 노동의 대가로 얻은 당신만의 방입니다"

이 사실을 어떤 세입자도 잊지 않으면 좋겠다. 이것은 떠돌며 살아야 하는 도시 유목민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이 우리 사회에 큰 충격과 울림을 주었던 이유는 이 모녀가 유서와 함께 마지막 월세를 남겨 놓음으로써 세입자의 최후 보루인 자존심을 지켰기 때문 아닐까. 부디, 세상 모든 세입자의 방에 평화가 깃들길 바란다.

(p. 62)


도스토옙스키 소설이 대개 그렇듯 <백야>의 이야기가 그렇게 아름답게만 흐르지는 않는다. 주인공은 네 번째 백야에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나 위기를 맞는다. 마치 대낮 같은 환한 백야가 일시적인 현상이듯 그의 인생에 찾아온 첫사랑도 그렇게 사라질 위험에 처한다. 하지만 소설의 결말을 보면 주인공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높은 허들로만 여겨 왔던 여성과 대화를 나누며 소통했던 경험, 벅찬 심정으로 여자의 손을 잡고 걸었던 그 짧은 경험을 통해 자기 자신과 화해할 수 있는 첫걸음을 내디뎠다는 사실을 말이다.

"너의 하늘이 청명하기를, 너의 사랑스러운 미소가 밝고 평화롭기를, 행복과 기쁨의 순간에 축복이 너와 함께하기를! 너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어느 외로운 가슴에 행복과 기쁨을 주었으니까!"

<백야>의 주인공처럼 친구도 없고, 애인도 없고, 직장과 돈도 없이 있는 것이라곤 낮은 자존감뿐인 사람을 여전히 주위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 많은 시대 아닌가. 누군가에게는 혹은 어느 시대에는 당연시되었던 연애와 결혼, 출산과 취업, 내 집 마련과 건강, 돈독한 인간관계 가 시나브로 높디높은 허들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삶의 조건들 속에서 이방인이 아니라고 느끼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그러므로 기성세대는 저성장, 저출산을 염려하며 젊은이들에게 건네는 덕담을 이제는 조금 바꾸었으면 좋겠다. 우선은 자기 자신과 화해하라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고, 그러자면 사회가 변해 주어야 마땅하겠지만 변화란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우선은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그 방법이란 게 연애일 수도, 고유한 창작 활동일 수도 있으며, 아주 단순한 목표이더라도 온전히 자기 자신이 즐겁기만 하다면 무엇이라도 괜찮다고. 그런 것을 여러분이 '소확행'이라고 부른다면, 그 소확행을 충분히 누리라고.

(p.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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