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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랜맨 Aug 24. 2020

나는 생각하는 부품이 되고 싶었다

<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 08/02~05 | 무엇보다책방

"실패한 인생은 어떻게 계속되는가?"


김연수 작가와 한 언론 매체의 인터뷰 기사 제목이다. 젊은 나이에 한반도 최고의 시인으로 손꼽히던 백석은 어느 순간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이 되고, 수십 년의 세월을 흘러 보내다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해방 후 북한에서 그의 삶을 상상하며 풀어낸 <일곱 해의 마지막>은 시를 쓰지 않음으로써 본인의 시를 지켜 내고자 했던 백석의 일곱 해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실패한 인생이라는 표현은 다소 가혹하지만, 실제로 백석은 살아생전에는 본인이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가 오랫동안 모으고 다듬어 온 아름다운 말들은 공산주의 하에서 한정적인 단어와 표현으로 제한되었고, 힘겹게 집필한 시는 빨간 줄로 난도질당했으며, 사상의 검증을 강요받았다. 끝내 백석은 1962년 찬양시인 「나루터」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시를 쓰지 않는다. 당은 생각하고 문학은 받아쓴다는 것. 그러자면 쓰는 동안에는 생각하지 말아야만 했는데, 그는 그러지 못했다.


창작을 업으로 하는 사람을 좁은 틀에 가둔 채 답을 강요하는 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곧 생각을 바꿨다. 그 고통의 크기를 충분히 가늠할 수는 없겠지만 비슷한 경험은 나에게도 있었으니까. 아니, 아마 모든 회사원들이 몇 번쯤은 겪어봤을 일 아닐까?


이전 회사에서 일했던 때. 대규모의 브랜드 광고를 준비하고 있었다. 수십 억 원의 예산을 확보해 유명한 광고대행사와 대행 계약을 체결했다. 회사에서 수립한 경영전략에 맞춰 방향을 수립하고 스토리보드를 만들어 진행된 임원 보고. "스토리는 좋은데, 광고 마지막에 우리 회사 로고 빼고 다른 회사 로고 집어넣어도 전혀 이질감이 없지 않아? 우리 회사를 연상시키는 무언가가 딱 보여야 되는 거 아냐?" 아니, 우리 회사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는 브랜드 광고를 통해서 이제부터 만들어 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게 누가 이랬다 저랬다 톤 바꿔가면서 당장 효과 낼 수 있는 서비스나 상품 홍보에만 집중하고, 브랜드 광고는 아예 무시하고 있으라고 했나. 다시 고난의 시간이 지나고, 고객이 주로 떠올리는 우리 회사의 이미지와 그룹 브랜드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다시 스토리보드를 만들었다. "재미가 없지 않아? 요즘 세대들한테는 너무 진부하게 보이지 않겠어?" 우리 회사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한껏 살리라면서요. 그래서 이렇게 고리타분해진 겁니다, 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이후로도 젊은 고객층에 맞춰 트렌디함을 강조하는 스토리보드는 회사의 핵심 고객인 부유층이나 중장년층과 맞지 않는다고 퇴짜를 맞았고, 유명 프로그램을 패러디하여 재미있게 만든 시안은 너무 가볍고 진중함이 없다며 거절당했다. 심지어 전문가 집단인 광고대행사에서 밤낮없이 고민하여 만들어 온 광고 카피와 대사에까지 거침없이 손대는 그들을 보며, 도저히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는 도저히 민망해서 대행사 직원들을 볼 낯이 없었다. 그 해가 끝날 때까지 끝내 광고는 집행하지 못했다.


며칠 전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맞은편 버스정류장을 지나가는 버스에 회사 광고가 래핑 된 것을 보았다. 뭔가 결과물을 만들어 낸 것이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얼마나 고생했을지 상상되어 안쓰러운 마음이 교차했다. 아무 생각하지 않고 일했다면, 윗선에서 시키는 대로 할 뿐 내 탓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버텼다면 마음이라도 좀 편했을까. 아, 역시 그건 아니다. 아무리 내 회사도 아니고 내가 없어도 회사는 멀쩡히 돌아간다 해도 그래도 그건 아니다. 아무리 커다란 조직의 작은 부품 하나였을지 몰라도. 나는 생각하는 부품이 되고 싶었다.


불현듯 악동뮤지션의 노래 한 곡이 떠올랐다.


나에게는 해도 물도 필요하지 않아. 그런 거 없이도 배부르게 살 수 있으니까.

나에게는 시들 걱정 필요하지 않아. 밟히고 뭉개져도 내 색을 잃지 않으니까.

모든 게 좋아 보여. All things I have are looking good.

하지만 내가 행복하지 못했던 이유는. You know why?

나도 숨 쉬고 싶어. 비를 삼키고 뿌리를 내고 싶어.

정말 잔디처럼. 정말 잔디처럼.

바람이 불면 간지러워하는 들판을 봐. 흔들거려도 내 풀잎은 느껴지지 않아.

흙 땅과 맞닿은 맨살에 부끄러워하는 저 풀들과 다르게 난 생기가 돌지 않아.

그들은 좋아 보여. All things they have are looking good.

시들어가는 모습도 아름다은 이유는. You know what?

나도 숨 쉬고 싶어. 비를 삼키고 뿌리를 내고 싶어.

정말 잔디처럼. 정말 잔디처럼.

빛 없이 물 없이 영원할 것 같았던 나의 잔뜩 상해버린 가짜 풀잎이 뜯겨지네.

나도 숨 쉬고 싶어. 비를 삼키고 뿌리를 내고 싶어.

정말 잔디처럼. 정말 잔디처럼.

나도 느끼고 싶어. 살아있다고 하늘을 펄럭이고 싶어.

잔디처럼. 정말 잔디처럼.



벨라는 여행 가방 속에 들어 있는 기행의 노트를 떠올렸다. 서양식대로 페이지를 넘기면 결말부터 읽게 된다는, 세로로 써 내려간, 동양의 글자들. 인생을 거꾸로 산다면 어떻게 될까? 결말을 안 뒤에 다시 대조국 전쟁을 거쳐 십 대 시절로 돌아간다면? 장차 시인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네크라소프의 시를 읽는다면? 얘는 전쟁에 가서 돌아오지 못할 거야,라고 생각하며 급우와 대화를 나눈다면? 그렇다면 원래보다 더 슬플지는 모르겠으나 그 순간에 더욱 집중하긴 할 것이다. 미래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과거는 잘 알고 있으니, 오로지 현재에만, 지금 이 순간에만. 벨라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세르게이가 벌떡 일어섰다.

(p. 26)


이제 인생은 매사에 벨라에게 질문을 던졌다. 인생의 질문이란 대답하지 않으면 그만인 그런 질문이 아니었다. 원하는 게 있다면 적극적으로 대답해야 했다. 어쩔 수 없어 대답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 역시 하나의 선택이었다. 세상에 태어날 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그러므로 그건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리고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져야만 했다. 설사 그게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일지라도. 벨라는 호숫가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섰다.

(p. 38)


전쟁이 끝나자 지옥보다 더 나쁜 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것은 지옥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이었다. 그런 삶에도 탈출구가 있는 것일까?

생각에 잠긴 기행에게 벨라가 말했다.

"그리고 이제 그 상을 더 이상 스탈린상이라고 부르지 않아요. 소련연방상으로 이름을 바꿨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아무리 혹독한 시절이라도 언젠가는 끝이 납니다. 사전에서 '세상'의 뜻풀이는 이렇게 고쳐야 해요. 영원한 것은 없는 곳이라고."

(p.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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