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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랜맨 Aug 17. 2020

나의 서울스러운 날들

<제주스러운 날들>, 강민경 | 07/29~31 | 책보부상

이게 다 드론 때문이다. 발목에서 찰랑거리는 투명한 바닷물, 바람에 살랑이는 억새,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 구멍이 송송 뚫린 돌을 무심히 쌓아 올려 만든 담장을 보여주다가 갑자기 두둥실 화면이 높이 떠올라 멀어진다. 곧이어 에메랄드 빛으로 반짝이는 바다, 빨갛게 불타오르는 노을을 배경으로 봉긋 솟아오른 오름, 진한 초록이 끝없이 펼쳐지는 숲과 한라산, 논밭 사이에 돌담과 제주 전통가옥이 드문드문 놓인 정겨운 시골 마을을 내려다보는 화면이 TV를 가득 채운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온다.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TV 프로그램이 늘어나면서 이전보다 자주 접하게 되는 모습이다. 사회생활 10년 차. 적지 않은 돈을 모았지만 은행의 도움 없이는 여전히 서울에서 전셋집 하나 마련하기 어려운 현실. 그래도 이 정도면 제주도에서 적당한 위치의 작은 집 정도는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뭐 해 먹고살아야 하지? 외지인들이 제주에서 터 잡고 사는 것이 쉽지 않다던데, 조금 더 돈을 모아서 내려가야 할까? 벌써 11시네. 내일 출근하려면 일찍 자야 하는데. 에휴, 출근하기 싫다... 수십 번은 반복했을 생각들. 괜히 사람 마음만 들뜨게 만들고. 역시 이 다 드론 때문이다.


제주도 앓이는 꽤 오래되었지만 정작 가본 것은 딱 한 번이다. 초등학생 때 보이스카우트에서 여름방학 탐사로 갔던 것이었으니 20년도 더 지난 일이다. 배를 타고 가는 루트에, 돌아오는 길에는 광주 비엔날레 방문도 끼어있는 3박 4일 일정. 아마 제주도에서 보낸 시간은 채 이틀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마저도 당시 수학여행 코스를 답습하며 용두암과 만장굴, 천지연폭포처럼 요즘은 잘 찾지 않는 관광지만 골라 다녔다. 요즘의 제주에 대해서는 TV와 책을 통해 접한 막연한 환상이 전부인 셈이다. 12,000일도 넘게 보낸 내 인생을 쭉- 펼쳐놓았을 때 그중 이틀을 살았던 곳. 바르셀로나나 로마, 하와이, 싱가포르보다도 내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은 곳. 그마저도 20년 전의 어렴풋한 기억만 남은 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란 말만 들으면 가슴이 쿵쿵 뛰는 것은, 왠지 손을 뻗으면 잡힐 것 같은 현실성 때문이리라. 분명 더 아름다운 곳이 지구 상 어딘가에 또 있겠지만, 말도 통하고 멀지도 않고 지금의 삶을 모두 버리고 떠나지는 않아도 된다는 점 때문에 정말 굳게 마음먹으면 떠날 수도 있겠다 싶은 곳. 그래서 제주는 흐릿하게 더 아름답다 생각되는 곳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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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동안 마치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겨울부터 시작하여 봄, 여름, 가을까지 사계절을 담아내며, 채집하고 수확하여 요리하고 무언가를 만드는 삶. 현실의 문제에 대한 고민 없이 온전히 먹고사는데 집중하는 삶. 조금은 비현실적이면서도 왠지 모르게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삶. 들판에서 고사리를 꺾고, 바닷가에서 보말을 따서 요리하고 해안가에서 유리조각을 주워다 작은 공예품을 만드는 '제주스러운 날들'을 상상하게 만든다.


회사 일이 힘들었다는 이유로 퇴근 이후 집에 돌아오면 거실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 무언가를 시켜 먹거나, 겨우 끼니를 때우는 수준의 식사를 마친 뒤 TV를 켜고 보는 둥 마는 둥 시간을 흘려보내는 시간. 일찍 잠들어 버리기에는 뭔가 억울해서 굳이 졸린 눈을 비비며 고작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보며 끝나가는 하루를 부여잡고 있는 순간들. 불과 몇 주만 지나더라도 그 날 무엇을 했는지 조금도 기억에 남지 않을 그저 출근과 퇴근만 한 날들. 더 이상 이렇게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회사에서의 일과 내 일을 분리할 것. 받은 만큼만 일하되, 받은 만큼은 일할 것. 내 삶이 회사와 업무에만 얽매이지 않도록 나만의 시간을 확보할 것. 취향을 찾기 위해 다양한 경험을 하고 무언가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취미를 가질 것. 풍요로운 나만의 '서울스러운 날들'을 떠올리고 그것을 충분히 즐길 것.



시간이 느리게 가는 계절.

바삭거리는 귤껍질,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소리, 공간이 따뜻해지는 시간.


제주의 봄은 꽃들과 함께 불쑥 찾아온다. 춥다고 꽁꽁 싸매고 있었는데, 어느새 봄이 되어버리는 제주다. 노랑, 연두 꽃이 가득 피고 바람이 따뜻해지는 봄이 오면 기지개를 켜고 더 놀아볼 준비를 해야 한다. 그쯤 자주 내리는 봄비는 고사리를 여덟 번 꺾을 수 있게 해 주고, 어린 모종들이 씩씩하게 자라게 도와준다. 아름다운 봄날의 시간은 금방 지나가 버리니 이 계절에는 현재를 즐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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