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거와 개울과 자연재해
내가 사는 동네는 경사진 산자락으로 둘러 싸여 있다. 자연히 여름철 태풍이 온다는 뉴스가 나면 동네 사람들은 조금 긴장을 한다. 무엇보다 산자락에 붙어 있는 집들이 그렇다. 태풍이 북상한다는 뉴스를 보면 곳곳에 야산이 무너지고, 개울이 넘치고, 나무가 쓰러져 집을 상하게 했다는 소식들이다. 그런 뉴스를 들으면서 동네 사람들은 별 탈 없이 태풍이 지나가기를 한 마음으로 바랐다.
그런 바람이 통했던 것일까? 이 마을이 만들어지고 10년이 지났지만 그동안 특별히 자연재해를 입은 집이 없다. 기껏해야 집 근처 전봇대에 벼락이 내리쳐 집안의 전기 차단기가 내려가는 바람에 텔레비전 보다가 차단기 올리려 갔다 와야 하는 수고를 하는 것이 가장 큰 자연재해의 피해였다. 그만큼 무척이나 안전한 마을이다.
그런데 올해, 그러니까 작년이다. 마을에 수해가 났다. 텔레비전에서나 보았던, 군장병들이 투입되어 토사를 치우고, 마당을 정리하는 모습을 아주 가까이서 실시간으로 보게 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나!
더욱 놀라웠던 것은 수해가 날 것이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던, 동네 한가운데 있는 집에서 수해가 났다. 태풍이 오면 걱정을 했던 산자락 집들은 아무 탈이 없었고, 수해와 전혀 상관없을 것 같았던 동네 한가운데 집이 물 피해를 입은 것이다. 1층 거실까지 물에 잠기는 바람에 10여 일 넘게 온 식구들이 인근 모텔에서 생활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물은 제 길을 찾아간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그냥 뒷산이라 부르지만 양평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 동네 뒷산을 서석산이라 부른다. 뜻풀이를 하자면 '서쪽에 있는 돌산'이다. 그만큼 산에 돌이 많다. 실제로 동네 사람들과 뒷산에 올라보면 보통의 야산보다 바위가 많다.
돌이 많은 산이다 보니 물 빠짐이 좋다. 그러다 보니 마을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폭이 2미터쯤 되는 아주 작은 개울이 있는데 언제나 말라 있다. 이른바 건천이다. 그 개울에 물이 흐르는 것은 여름 폭우가 쏟아질 때 잠깐이었다. 그것도 비가 내릴 당시에나 흐를 뿐 비가 그치고 나면 금세 말라버렸다.
자연히 동네 사람들은 마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개울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물도 흐르지 않는 데다, 그 개울을 따라 마을 위로 계속 올라가면 어느 순간 개울이 사라지면서 그냥 먼지가 폴폴 나는 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 아니 작년 여름에 바로 그 개울이 문제를 일으켰다. 작년 여름, 알다시피 전국적으로 수해가 대단했다. 우리 동네에도 무척 비가 많이 내렸다. 그리고 어느 날, 있는지 없는지 존재감도 없던 바로 그 개울이 넘치고 말았다. 그 개울이 넘칠 것이고 예상한 사람은 동네에 단 한 명도 없었다.
장대비가 오던 어느 날 밤. 워낙 비가 많이 오니 걱정이 된 사람들이 하나둘 우산을 쓰고 나왔다. 그러다가 그 개울이 넘친 것을 발견했다. 개울을 따라 두 집이 나란히 있었는데, 첫 번째 집 마당으로 물이 흘러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당시만 해도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 지대가 높고 바로 집 옆으로 경사진 도로가 있어 마당으로 들어간 물이 그 도로를 따라 흘러내려가게 되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그 집 마당으로 물이 들어가지 못하게 맨손으로 돌 둑을 쌓았다. 사람 손으로 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지만 그래도 상당한 양의 물을 줄일 수 있었다.
안전을 위해 그 집 사람들은 읍내 모텔로 대피를 했고, 동네 사람들도 밤이 늦어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야속하게도 그날 밤 비는 그치지 않고 계속 내렸다.
다음 날 아침. 그 집에 가보니 1층 현관문까지 토사로 뒤덮여 있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다른 집들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동네 한가운데 있는 그 집만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다. 물이 문제가 아니라 물과 함께 쓸려 내려온 나뭇가지와 토사가 문제였다.
물은 경사진 곳을 따라 흘러가게 마련이지만 그 물에 산에서 떠밀려 온 나뭇가지들이 섞여 있으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나뭇가지가 마당 펜스에 걸리면서 물길을 막아 버렸다. 그러자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물이 집 안으로 넘쳐 들어가고 말았다.
물이 빠지고 난 뒤, 그 집 마당에는 50센티미터 이상의 토사가 쌓여있었다. 예뻤던 그 집 마당은 돌밭이 되어 있었고, 마당 한가운데로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1층 현관문이 안 열릴 정도로 토사가 높이 쌓여 있었으니 집안은 안 봐도 상황을 짐작할 만했다.
나는 그 집 마당을 보면서 참으로 물이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무섭다는 생각을 한 것은 그 집이 물 피해를 입어 그런 것도 있지만, 물이 어쩌면 그렇게 정확히 제 길을 찾아갔는지, 그것이 무서웠다.
'구거가 포함된 땅의 장단점'이란 제목의 글을 브런치에 쓴 적이 있다. 그 글에서 이번에 수해가 난 그 집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글의 주제가 구거였다.
구거란 쉽게 말해 작은 개천을 말한다. 이런 곳을 지적법상 용어로 구거라 하는데, 지적도를 떼어 보면 아주 작고 좁은 구거도 모두 표시가 되어 있다. 문제는 그런 구거들이 예전에는 물이 흘렀던 곳이지만 이런저런 개발로 지형이 바뀌면서 현재는 물이 흐르지 않아 눈으로 보면 그냥 땅으로 보이는 곳이 많다는 사실이다. 그런 구거들은 오직 지적도에만 표시될 뿐 현장에 가서 보면 물과 전혀 상관없어 보인다. 이번에 수해가 난 그 집이 그랬다.
폭우가 쏟아지면 저런 나무들이 떠내려와 물길을 막는다. 그 때문에 피해가 크진다. 아주 작은 실개천이라도 이런저런 부유물들이 물길을 막아 버리면 주변이 침수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래서 하천 주변에 집을 지을때는 무척 신중해야한다.
그 집 뒷마당 쪽이 개울을 접하고 있었지만 그 개울이 범람을 한다고 가정해도 그 집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은 없었다. 지대가 낮은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수해를 입었다. 개울에서 범람한 물이 마당을 타고 흘러 들어가면서 집까지 피해를 입힌 것이다. 내가 놀란 것은 집에 피해를 준 그 물길이 지적도상에 표시된 구거와 완벽하게 일치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물이 원래 제 길을 찾아간 것이었다.
'구거가 포함된 땅의 장단점'이란 글에서 이야기했지만, 가끔 땅을 보러 다니다 보면 부동산 업자가 보여주는 필지 한가운데로 구거가 지나는 땅들이 있다. 구거는 국가 소유라 매매가 불가능하고 어떤 형태의 개발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런 구거가 사고자 하는 땅 한가운데를 지나거나 가장자리에 붙어 있으면 공짜로 제 땅처럼 사용할 수가 있어 이점이 많다.
아마 이번에 수해가 난 집도 부동산 업자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예전에는 물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개발 과정에서 축대를 쌓고 흙을 채워 넣는 바람에 땅 자체가 높아져 버려 물과는 전혀 상관없는 땅이 되기도 했으니 집주인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지적도 상에 표시된 그 구거를 따라 정확하게 물이 흘렀고, 큰 피해를 입었다.
구거가 포함된 땅을 구입할 때는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았다. 만약 이번 사건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구거가 포함된 땅이면 국가 땅을 공짜로 사용할 수 있으니 좋다'는 생각을 계속했을 것이다.
땅이 사라졌어요
작년 여름에는 우리 동네뿐 아니라 옆동네도 수해를 많이 입었다. 우리 동네 뒷산을 올라가 거꾸로 엎어 놓은 사발 형태로 한 바퀴 돌아 내려가면 옆동네로 나온다. 그 동네는 한가운데에 제법 개울같은 개울이 흐른다. 폭이 5미터쯤 될려나.
그 개울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산속 계곡으로 연결된다. 역시 돌산이라 물이 많지는 않지만 1년 내내 물이 졸졸 흐를 정도로 우리 동네 건천과는 차원이 다르다.
최근 뒷 산에 올라갔다가 그쪽 동네로 내려온 적이 있다. 그때 엄청난 변화를 목격했다. 동네 끝자락에 작은 절이 있었는데 사라지고 없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지난 여름 폭우에 마당 가에 있던 계곡이 범람하면서 요사채가 떠내려 갔다고 했다. 겁이 난 스님이 나머지 절간을 그대로 뜯어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했다. 자세히 보니 절 앞에 폭 30미터쯤 되는 계곡이 만들어져 있었다. 원래는 도랑 수준이던 계곡이 여름이면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해도 될 정도로 변해 있었다.
절터를 지나자 더 놀라운 모습이 기다리고 있었다. 작년 봄에 개울가에 있던 논에 흙을 부어 높인 뒤 보강토를 쌓아 축대를 쌓아 전원주택용 필지를 만든 곳이 있었다. 다섯 필지나 되다보니 그 옆을 지날 때면 마치 운동장 가를 걷는 것 같았던 곳이다. 그런데 그날 보니 반 이상이 사라지고 없었다. 지대가 낮은 개울 쪽에 쌓아놓았던 보강토도 다 떠내려가고 흔적도 없었다.
그 필지가 얼마나 분양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땅을 분양받은 사람은 자신이 산 땅의 절반 이상을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남은 땅을 살릴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큰 비가 오면 같은 현상이 되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곳이 논이었을 때부터 보아왔다. 그곳을 지날 때면 실개천이 흐르는 그 땅을 보면서 '저기 집을 짓고 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이었는지 수해 이후의 그 땅 모습이 말해주고 있었다.
도시 사람들은 개울가에 있는 집을 좋아한다. 나도 예전에 그랬다. 하지만 옛부터 '개울 가에는 집을 지어서는 안 된다'는 말도 있었다고 하니, 개울을 끼고 있는 땅을 구입할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