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편으로 보내다
편지를 한 장 썼다. 수신인은 ‘익명의 출판사 대표’였다. 간단히 내 소개를 하고, 내가 그동안 어떻게 인도 여행을 했는지, 내가 갔다 온 곳이 어디 어디인지 적었다.
적고 보니 정말 인도를 ‘이 잡듯이’ 다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서울에서 출발해 강릉으로 간 뒤, 동해안을 따라 부산으로 갔다가, 남해안을 따라 목포까지 가서, 지그재그로 내륙을 훑으면서 다시 서울로 돌아온 식이었다.
나는 내가 갔다 온 곳에 대해 아주 꼼꼼하게 기록한 노트가 무려 세 권이나 된다는 이야기도 빼먹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한국인들을 위한 맞춤 가이드북을 아주 잘 쓸 자신이 있다고 적었다.
그 편지를 쓸 무렵, 나는 콜카타에서 기차로 하룻밤 거리에 있는 보드가야에 있었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그 동네다. 불교 최대 성지인 보드가야는 우리나라 면 소재지만 했지만 각 나라의 절이 들어서 있었고, 성지 순례자들이 많아 늘 복작거렸다. 각 나라가 세운 절들은, 말이 절이지 순례자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 역할을 했다.
당시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려 독자적 여행이 불가능했던 나는, 보드가야에 막 들어선 고려사라는 한국 절에 머물며 스님들(두 사람) 공양주 노릇을 하고 숙식을 해결하던 중이었다.
어느 날, 고려사에 한 무리의 남녀대학생들이 나타났다. 보드가야에 온 한국 여행자들은 아무 볼 것도 없고, 보드가야 중심에서 제법 멀어 한참 걸어와야 하는 고려사인데도 한국 절이라는 이유로 꼭 들렀다. 그 대학생 무리와 보드가야에서 재미나게 어울렸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며칠 뒤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나는 그들 중 착하고 책임감 있어 보이는 한 남학생에게 편지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 돌아가거든, 교보문고에 가서, 어떤 가이드북이 나와 있는지 살펴보고, 그중 괜찮아 보이는 출판사가 있으면 책 뒤에 나와 있는 주소로 이 편지를 부쳐 주시오”
참 (허무)맹랑한 부탁이었지만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기도 했다. 편지 끝에는 고려사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 놓았다.
며칠 뒤, 대학생 무리는 보드가야를 떠났다. 콜카타로 가서 방콕을 거쳐 한국으로 간다고 했다. 나는 그 남학생이 나의 부탁을 잘 들어주기만 바랐다.
대학생 무리가 떠난 지 1주일이 지났다. 하지만 아무 연락이 없었다. 다시 1주일을 기다렸다. 역시 아무 연락이 없었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 친구가 편지를 제대로 부치기는 한 것일까?’
‘편지는 제대로 전달했는데, 출판사에서 관심이 없나?’
또다시 1주일이 지났다. 여전히 편지도 전화도 오지 않았다. 그 대학생이 내 부탁을 제대로 들어주었는지 의심스러웠지만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한국이라면 일단 원고를 써 놓고 출판사를 찾을 수도 있었겠지만, 인도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수중에 돈이 거의 없어 더는 인도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플랜 B를 생각해야 했다. 플랜 B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 유학생들이 많이 있는 산티니케탄으로 가는 것이었다. 보드가야에서 기차로 8시간 거리에 있는 산티니케탄에는 타고르가 세운 비스바바라티 대학이 있었다.
당시 그 대학에 한국인 유학생들이 10여 명 있었다. 산티니케탄에 갔을 때 나는 그들을 알게 되었고, 제법 프랜드 쉽을 강화해 놓았다. 그 유학생들은 기본적으로 인도에 5년 이상 머물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내가 어떻게, 무엇을 하면 비행깃값을 벌어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효과적인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산티니케탄으로 떠나기 위해 짐을 꾸렸다. 아침을 먹고, 스님들에게 인사를 하고 막 떠나려 할 때였다. 좀체 울리지 않던 고려사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인도인 관리자가 전화를 받더니 나를 찾았다.
이런저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고려사 절에 있는 전화를 통해 나를 찾을 사람은 내가 편지를 맡긴 그 남자 대학생과 출판사 관계자뿐이었다.
전화를 받았다. 한국에서 온 전화였다. 출판사라고 했다. 그런데 감이 너무 멀어 말 내용을 알아듣기 쉽지 않았다. 통화 도중 끊김 현상도 잦았다. 자연히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들은 말은 있었다. ‘쓰세요’라는 말이었다. 내 입장에서 긍정적으로 확대해석하면, ‘출간해줄 테니 가이드북을 써라’는 말이었다.
전화는 미처 그 말을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끊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걸려 오지도 않았다.
나는 ‘쓰세요’라고 했던 그 말을 그냥 믿기로 했다. 당시 내 상황이란 것이,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그날부터 본격적으로 인도 가이드북을 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