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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의 음악 Oct 09. 2021

가톨릭 신학 대학 간략사

교구별로 교육을 받는 신학교가 다르다

내가 대구 신학교에 입학할 당시 전국에는 4개의 가톨릭 신학교가 있었다. 서울(1855년 개교)과 광주(1962년 개교), 수원(1982년 개교) 그리고 대구(1982년 개교)에 있었다.      


한국의 모든 신부들은 이 4개의 신학교 가운데 한 곳을 나와야 했다. 2021년 현재는 인천과 대전에도 신학교가 있다. 이들 신학교들은 각 학교마다 입학생을 받는 교구가 정해져 있다. 2021년 상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 서울대교구, 의정부교구 성직자 양성

수원 가톨릭 신학대학 – 수원교구, 원주교구, 춘천교구 성직자 양성

인천 가톨릭 신학대학 – 인천교구 성직자 양성

대전 가톨릭 신학대학 – 대전교구, 청주교구 성직자 양성

대구 가톨릭 신학대학 – 대구대교구, 부산교구, 안동교구 성직자 양성

광주 가톨릭 신학대학 – 광주대교구, 전주교구, 제주교구, 마산교구 성직자 양성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내가 대구 신학교에 다닐 때는 대구교구, 마산교구, 청주교구, 안동교구 신학생들이 같이 교육을 받았다. 지금은 좀 변화가 있다. 마산교구 신학생들이 광주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청주교구 신학생들은 대전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다. 대구 신학교에는 대구교구와 안동교구, 부산교구 신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내가 신학생 때 부산교구 신학생들은 광주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교구마다 교육을 시키는 신학교가 달라지는 이유는 교구를 책임지고 있는 주교님이 자신의 신학생들을 어느 학교로 보낼지 결정하기 때문이다. 물론 주교님의 결정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가능하면 교구에서 가깝고, 해당 신학교가 학생들을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지 따져 봐야 한다. 모든 신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을 한다. 하루 24시간 생활 지도를 책임져야 하는 신학교 입장에서는 적정 규모의 수용 인원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한국 천주교 성직자의 역사


한국 천주교 성직자의 역사는 김대건 신부로 거슬러 올라간다. 1821년(순조 21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난 김대건은 15살이던 1836년(헌종 2년)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신학생을 선발하기는 했지만 당시 조선에는 이들을 교육할 신학교가 없었다. 신학 교육을 시킬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 마카오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였다. 당시 포르투갈령이었던 마카오는 서방 국가들의 극동 무역(식민지 수탈) 전초기지이자 유럽 선교사들의 극동 선교 거점 도시였다. 그곳에는 가톨릭 성직자들이 많았다. 그들 중에는 신학생 교육을 시킬 수 있는 신부들이 있었다.     



벽만 남아 있는 마카오의 성 바오로 성당. 이 성당은 서양의 동양 식민지 수탈 중심이자, 가톨릭 선교 거점의 핵심 지점이었다. 이 양면성에 대해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한다.


김대건과 최양업, 최방제는 육로를 통해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세 사람은 신부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불행하게도 최방제는 마카오에 도착한 지 1년 만에 풍토병으로 죽고 만다. 김대건과 최양업만 1842년까지 중등 과정의 일반 교육을 포함해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김대건은 1845년 1월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을 돕기 위해 잠시 귀국한다. 그때만 해도 김대건은 신부가 아니었다. 신부가 되기 위한 전 단계인 부제품을 받은 상태였다. 부제 신분으로 조선에 들어온 김대건은 천주교 박해로 피폐해진 조선 천주교회를 수습했다. 그리고 상해로 건너가 같은 해 8월 17일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최초의 한국인 신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0월 다시 조선에 입국한 김대건 신부는 사제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다가 1846년 9월 15일, 안타깝게도 참수당하고 만다. 신부가 된 지 겨우 1년 1개월 만이었다.      


김대건 신부와 같이 공부했던 최양업은 김대건 신부보다 4년 늦은 1849년(헌종 15년) 북경에서 마레스카 주교로부터 조선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신부가 된 뒤 조선으로 귀국한 최양업 신부는 열정적으로 사목 활동을 벌였다. 당시 조선은 철종 시대였다. 천주교가 다소 묵인되던 그런 시기였다. 최양업 신부는 1861년(철종 12년) 40세의 나이로 문경에서 병사하기까지 11년 6개월 동안 전국을 돌며 천주교를 전파했다.      


조선 최초의 신학교 


한편, 1855년 프랑스 외방전교회 소속 메스트르 신부는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에 성 요셉 신학교를 설립했다. 조선인 사제 양성을 목적으로 교황청의 신학교 설립 승인을 받아 세운 학교였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가톨릭 신학대학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성 요셉 신학교는 신학과와 라틴어과로 나누어져 있었다. 교과목은 철학과 신학을 중심으로 하면서 서양 학문과 문물도 가르쳤다. 여기에다 동물과 식물, 지리학, 의학, 과학 지식과 더불어 일반상식까지 가르쳤다.      


수업은 주로 여름철에 이루어졌다. 그 밖의 기간에는 전교 활동을 했다. 신학생 수는 10명 안팎이었다. 장소가 좁고, 천주교 박해가 심할 때라 많은 학생들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성 요셉 신학교는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초·중·고등 교육을 함께 실시한 근대적인 학교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1866년(고종 3년) 천주교 대박해 때 교장 신부를 비롯해 성직자들이 붙잡혀 순교하게 된다. 신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학교는 폐쇄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20년 동안 조선인 성직자가 한 명도 없는 상태에서 신학교마저 없었다. 그러다가 1885년, 조선 천주교회는 강원도 원주시 부흥골에 임시 신학교를 설립했다. 성 요셉 신학교를 계승하기 위해서였다. 그즈음 조불 조약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의 천주교 전교가 법적으로 보장받게 되었다. 원주에 있던 성 요셉 신학교는 1887년 서울 용산으로 옮겨졌다. 이름도 예수 성심 신학원으로 바꾸었다. 이것이 오늘날 서울 가톨릭대학교 신학부로 발전했다.      


한편, 신학교는 없었지만 조선 천주교회는 1882년부터 신학생들을 선발해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그러다가 용산의 예수 성심 신학원이 정상적으로 학사 운영을 시작하게 되자 유학생들을 귀국시켜 나머지 교육을 받게 했다. 그리하여 1896년 4월 26일 페낭 신학교 출신 신학생이던 강성삼, 강도영, 정규하가 조선에서 사제 서품을 받게 된다. 이로써 김대건과 최양업으로 이어지던 조선 출신의 신부가 맥을 잇게 되었다.     


남부 지역 성직자 양성을 위한 성 유스티노 신학교 


조선 천주교회의 교세가 확장되면서 더 많은 조선인 신부가 필요하게 되자 조선 천주교회는 경상도와 전라도 출신의 신학생 교육을 위한 두 번째 신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이 신학교가 1914년 대구에 세워진 성 유스티노 신학교다. 이 신학교는 1945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기까지 30여 년 동안 67명의 한국인 신부를 배출했다. 그러다가 1982년 다시 문을 열게 된다. 바로 대구 가톨릭 신학대학이다.      


1927년도에는 함경남도 덕원에도 신학교가 생긴다. 북부 지방의 신학생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신학교였다. 이렇게 해서 전국에 3개의 신학교가 있게 되었다.      


신학교를 이처럼 세부적으로 나눈 것은 이유가 있다. 가톨릭 사제 교육은 단순히 학문적 성취만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었다. 학문적 성취만이 중요했더라면 신학교를 세분하는 것보다 대규모로 키우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톨릭 신부 양성과정은 학업은 물론이고 신학생들의 생활 하나하나가 모두 교육의 대상이었다. 규모가 커지면 교육이 체계적일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끊임없이 세분화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전국의 모든 신학교는 강제 폐교되고 만다.      


다행히 용산 신학교는 1945년 ‘경성천주공교신학교(京城天主公敎神學校)’로 이름을 바꾸어 설립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 종로구 혜화동으로 옮겨 본과 4년과 연구과 2년 과정으로 다시 개교했다. 이 학교가 지금의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이다.      


해방 후 한국 천주교회는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자연히 성직자를 희망하는 학생들도 늘어났다. 혜화동 신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효과적인 교육을 위해 한국 천주교회는 남부 지역 신학생 교육을 위한 두 번째 신학교를 세운다. 이 신학교가 1962년 광주에 설립된 광주 신학교다(설립 초기에는 대건 신학대학이라 했다).     


광주 신학교가 생기면서 그때까지 서울에서 교육받던 대구 대교구, 광주 대교구, 부산교구, 마산교구, 제주 교구, 원주교구 신학생들이 광주 신학교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20년 뒤 한국 천주교회는 대구와 수원에 또 다른 신학교를 세운다. 그렇게 해서 광주 신학교에서 교육받던 대구 대교구, 마산교구 신학생들과 서울에서 교육받던 안동교구, 청주교구 신학생들이 대구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내가 신학교에 들어갔던 것이 이즈음이다. 이후 대전과 인천에 신학교가 생기면서 현재 전국적으로 6개의 사제 양성 교육 기관이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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