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삽질하지 말고 거기 서서 우스갯소리나 해!
신학교에서는 교육 아닌 것이 없었다. 군대에 가면 ‘고참이 똥을 싸도 작전의 일부’라는 말이 있다. 신학교도 신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교육 대상이었다. 공부나 기도생활은 말할것도 없고, 밥을 먹거나 청소, 운동마저 교육의 대상이었다. 그 가운데 또 하나가 노동 교육이었다.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학장 신부님은 전교생에게 1주일에 1시간의 작업 시간을 통해 직접 노동에 참여하게 했다. 노동을 통해 노동의 신성함과 존엄함을 알게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신부가 되면 평생 입으로 살 사람들이니 신학생 시절에 노동에 대해 확실한 교육을 시켜 놓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교칙 어디에도 없는, 학장 신부님의 개인적인 교육관에 따른 사적 명령이었다. 학점? 당연히 그런 것 없었다.
작업 시간의 대부분은 삽질이었다. 악착같이 삽질을 시키고 싶어 했던 학장 신부님은 우리의 삽질 현장에 지도 방문한 적도 많았다. 직접 삽질을 지도 편달한 적도 있다. 그 지도 편달 대상의 1호가 나였다.
대개는 멀찌감치 서서 매의 눈으로 삽질 현장을 지켜보다가 ‘쯧쯧’하는 표정으로 사라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날은 뭐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내게 달려오더니 삽을 뺏어 들고 ‘이렇게 해야지’하며 역정을 내셨다. 얼마나 삽질을 하고 있었으면 그랬을까.
도시 빈민으로 자란 내게 삽질이란?
나는 도시 빈민으로 자랐다. 신학교에 가기 전까지 삽질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다. 삽질을 할 만한 우리 집 소유의 땅이 없었다. 시골 성당 출신 신학생들은 달랐다. 노련하게 삽질을 했다. 연필을 쥐기 전에 삽자루부터 쥐었다며 은근 자랑하기도 했다. ‘자랑할 것까진 아닌 것 같은데’ 하면서도 ‘우와’ 해 주었다.
신이 난 그들, 일찍이 갈고닦은 삽질에다, 삽질의 가치를 유난히 높게 평가하는 학장 신부님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으니 확실한 동기부여까지 확보한 셈이었다. 여기저기서 과히 인간 포클레인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의 삽질 달인들이 출현했다. 학장 신부님은 그중 한 포클레인에게 칭찬을 퍼부었다. 나를 보고는 ‘좀 배우지’하는 눈짓을 했다.
난 배우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다. 삽질, 별로 잘하고 싶지도 않았다. 얼른 작업 시간이 끝났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학점도 주지 않는, 1주일에 1시간짜리 작업 시간이 폐강되었으면 했다. 맞다. 나는 천성적으로 몸으로 하는 일을 싫어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게을렀다. 그렇지만 총체적인 내 인생을 놓고 보면 별로 죄스러운 마음은 들지 않는다. 적어도 삽질에 한해서는.
2학년 마치고 군에 입대한 나는 4주간의 훈련소 생활을 빼고 나머지 군대 생활의 99%를 삽질만 했다. 명색이 현역 군인이었다. 그것도 직선거리로 40킬로미터 전방에 북한군이 총을 들고 서 있는 전투 사단의 현역 군인이었다. 그런 내가, 자대 배치 9개월 만에 처음으로 사격 훈련을 나갔다. 총을 어떻게 쏘는지 몰라 오줌을 지릴 뻔했다. 그런 개인적인 역사가 있기에 삽질 총량으로 따지면 내 또래 남자들 중에서 단연 선두 그룹에 속할 것이다.
대구 신학교가 건물 두 동과 운동장이 전부였지만 넓은 의미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각론으로 들어가면 운동장 가에 제법 넓은 과수원도 있었다. 신관 뒤쪽에는 건물을 짓기 위해 터 닦기 공사가 한창이던 곳도 있었다. 오리지널 노가다 삽질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최적화된 장소인 셈이었다. 실제로 그 공사 현장에서 삽질, 참 많이 했다. 물론 우리가 주로 삽질을 통한 노동의 중요성을 배운 실습 현장은 과수원이었다.
과수원에는 포도를 비롯해 이런저런 과일나무들과 여러 가지 야채 밭이 있었다. 주 관리 책임자는 식당 주방장 수녀님과 학교를 관리하는 몇몇 아저씨들이었다. 신학생들이 방학을 맞아 학교를 비우는 기간이 1년에 5개월쯤 된다. 그런데도 과수원은 늘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이런저런 농작물들도 별 탈 없이 잘 자랐다. 고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딱히 없었다. 그저 학장 신부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차원에서 노동의 중요성과 소중함을 배우기만 하면 되었다.
나는 단 몇 번의 삽질만으로 학장 신부님의 가르침을 필요 이상으로 잘 깨달았다. 따라서 굳이 힘들여 삽질을 많이 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삽질에 시큰둥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노동의 가치를 아는 것이었지 삽질 그 자체가 아니었으니까.
다른 신학생들은 나와 생각이 좀 다른 것 같았다. 특히 시골 성당 출신들이 그랬다. 그들은 몸에 밴 습관 때문인지 노동의 가치나 숭고함과 상관없이 삽만 잡으면 자동으로 인간 포클레인이 되었다. 도저히 말릴 수 없는 삽질 본능이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삽질을 해대는 그들을 보면서 살아온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했다.
나와 달리 도시 부잣집 아들로 살아온 범생이류 신학생들도 참 열심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그들이 살아온 환경 때문에 1주일에 1시간 하는 삽질로는 노동의 가치와 숭고함을 깨닫기 부족한 모양이었다. 자연히 그들의 삽질은 어설프면서도 애처로울 만큼 필사적이었다. 여차하면 작업 시간을 주 2회로 늘려 달라는 위험한 발언을 하지나 않을까 겁이 날 지경이었다.
삽질 현장 문선단 원맨쇼
일찍이 삽질 교육의 핵심을 꿰뚫은 나는 다른 신학생들이 삽질을 통해 열심히 노동의 가치와 숭고함을 배우느라 낑낑 될 때 삽자루를 어깨에 메고 과수원을 어슬렁거렸다. 열심히 삽질하는 동료 신학생들이 더 열심히 삽질을 할 수 있도록 우스갯소리를 해주어 힘든 삽질의 고통을 잊게 했다. 효과는 무척 좋았다. 무엇보다 이미 군대에서 지겹도록 삽질을 했을 예비역 형들이 좋아했다. 그들은 삽자루를 어깨에 메고 왔다 갔다 하는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그래, 넌 삽질하지 말고 거기 서서 그냥 우스갯소리나 해.”
군대도 갔다 왔고, 일반 대학도 졸업했고, 나이도 많았지만 신학교에서는 1학년 이상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그들이었다. 그런데도 책임지지 못할 말을 막 했다. 학장 신부님이 들었으면 틀림없이 ‘니가 뭔데?’했을 것이다. 아무튼 예비역 형들의 강력한 지지 속에서 나는 작업 시간이 되면 삽질 대신 국군 문선단처럼 원맨쇼를 했다.
과수원에 할 일이 없으면 삽질 부대는 학교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청소를 했다. 덕분에 청소하는 전문 인력이 없었지만 신학교는 늘 깨끗했다.
제대 후 복학을 했다. 여전히 1주일에 1시간의 작업 시간이 있었다. 작업 시간 폐지를 바랐던 나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셈이다. 많이 아쉬웠다. 아마 대한민국에 있는 교육부 인가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공식적으로 삽질을 시키는 곳은 신학교가 유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