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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의 음악 Oct 13. 2021

신학생, 군대 가다

야만스러운 군대에서 신학생으로서의 정체성 유지 하기

신학과 신앙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 2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다. 신학교 생활에 문제가 있어 휴학한 것은 아니다. 신학교 정책이 ‘2학년 마치고 일괄 휴학 후 3년 뒤 복학’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학업의 연속성을 위해 ‘4학년 마치고 일괄 휴학 후 5학년 복학’이었다. 왜 정책이 바뀌었는지 설명하려면 재미는 없고 길기만 하다. 그래서 패스.  

   

휴학 기간에 대부분의 신학생들이 군대에 갔다. 여러 가지 이유로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은 3년 동안 사회 경험 시간을 가졌다. 대개 가톨릭 교회가 운영하는 사회사업 기관에서 일했다. 나는 징집 대상자였다.  


1989년 2월 28일 새벽. 서울역에 내린 뒤 춘천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목적지는 102 보충대. 근처 이발소에 들러 머리부터 깎았다. 이발소 안에는 나 같은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머리를 갂고, 102 보충대 정문 쪽으로 갔다.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대부분 부모나 애인과 함께 온 듯했다. 입영 대상자보다 환송객들이 3배수쯤 많았다. 나처럼 혼자 온 사람도 간혹 있었다.      


연병장으로 들어갔다. 환송객들도 같이 들어갔다. 연병장 한쪽에 계단형 스탠드가 있었다. 징집 대상자들과 환송객들은 삼삼오오 스탠드에 앉았다. 맨 시멘트 바닥이라 엉덩이가 차가웠다. 마음은 더 차가웠다.      


어떤 군인 아저씨가 마이크를 잡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요즘 군대가 너무 좋아졌으니 부모님들은 안심하고 아들이나 동생, 애인을 맡겨도 된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멀어 계급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군인 아저씨의 말과 행동은 무척 신사적이었다. 예의도 바르고 이야기도 무척 부드럽게 했다. 스탠드에 앉아있던 입영 대상자들과 환송객들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감돌았다. 나 역시 마음이 편안해졌다. ‘요즘 군대 정말 좋아졌구나’     


이 무슨 예의 없는 짓거리람!


20여 분 동안의 군대 오리엔테이션이 끝났다. 그 군인 아저씨는 ‘이제 부모님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하면서 힘차게 거수경례를 했다. 사람들이 손뼉을 쳤다. 나는 안 쳤다. 박수받을 만한 것을 했다는 생각이 안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추운데 호주머니에서 손 빼기 싫은 게 더 큰 이유였다. 아마 부모님들은 자기 자식 제발 인간 좀 만들어, 아니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손뼉을 치는 것 같았다. 환송객들은 손뼉을 치며 연병장을 빠져나갔다. 잠시 뒤 스탠드에는 징집 대상자들만 남았다.       


다시 마이크를 잡은 군인 아저씨,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태도 변화였다. 좀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신사적이고 따뜻하던 그 군인 아저씨가 갑자기 동네 조폭처럼 변했다.    

  

“대가리 안 깎고 기어들어 온 '게시판'들 앞으로 튀어나왓!”     


목소리가 목을 벨 것처럼 날카로웠다. 나는 주먹질보다 말이 더 무서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심장이 콩닥거렸다. 혹시 이발소 아저씨가 나를 골탕 먹이려고 머리카락을 한 줌 남겨 놓은 것은 아닌지 반들반들한 머리통을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2백 명쯤 되는 입영 대상자 중에서 ‘대가리 안 깎고 기어들어 온 게시판’들은 스무 명 남짓 되었다. 그들은 번개같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상황판단은 빠른 듯했다.    

  

기관병 한 명이 바리깡을 들고 나타났다. 스무 명 남짓의 게시판들 ‘대가리’를 그 자리에서 밀어버렸다. 그냥 세워 놓고 밀었다. 10여 명의 게시판들은 교수형을 앞둔 사형수만큼이나 참혹한 표정이었다. 머리를 깎이는 게시판들보다 쳐다보고 있는 우리가 더 공포스러웠다.      


‘아, 나는 이 야만스러운 군대에서 신학생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한 체 무사히 제대를 할 수 있을까?’    

  

잠시 뒤, 앵그리 버드 눈썹을 한 군인 아저씨가 앞으로 나와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서울대, 연고대 다니다 온 놈들 튀어나왓!”    

 

뭔 소리지, 하는 사이 몇몇이 튀어 나갔다. 당연히 나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때 내게서 사선으로 5미터쯤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손을 들고 외쳤다.  

    

“카이스트는 안 됩니까?”     


그는 앵그리 버드의 말을 ‘대가리 좋은 놈들 앞으로 튀어나와’쯤으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대가리’ 좋은 걸로 따지면 자신 있다는 표정이었다. 마이크를 쥐고 있던 앵그리 버드가 눈썹을 11자로 만들었다.  

    

“너, 이리 튀어나왓!”     


카이스트는 번개같이 일어나 앞으로 튀어나갔다. 자기 생각에 카이스트가 서울대는 몰라도 연고대보다는 확실히 낫는데 자신이 거기에 끼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카이스트가 앵그리 버드 앞에 섰다. 앵그리 버드는 앵그리 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뭐라고 그랬어?”

카이스트가 대답했다. 

“서울대, 연고대라고 했습니닷!”

‘퍽!’     


화끈했다. 군더더기가 없었다. 앵그리 버드는 군홧발로 카이스트의 가슴팍을 냅다 찼다. 카이스트는 흙바닥에 벌러덩 나자빠졌다. 앵그리 버드는 카이스트를 팽개쳐 두고 서울대, 연고대 출신들만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시 새로운 군인 아저씨가 마이크를 잡았다.   

   

“키 180 이상 되는 놈들 앞으로 튀어나왓!”     


난 이번에도 해당 사항이 없었다. 보기에도 큼지막한 사람들이 우르르 튀어 나갔다. ‘대가리’가 나빠도 키만 크면 되는지 다른 조건들은 말하지 않았다. 그 군인 아저씨는 키 큰 사람들을 두 대의 군용 트럭에 나눠 싣더니 흙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잠시 뒤, 지프 한 대가 반원을 그리더니 스탠드 앞에 섰다. 지프 뒤에는 25인승 군용 버스도 따라붙어 있었다. 지프에서 선글라스를 쓴 군인 아저씨가 내렸다. 막 쿠데타에 성공한 정치군인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마이크를 잡고 아, 아, 하면서 잔뜩 무게를 잡더니 느릿하게 말했다.      


“에- 서울 강남에 살면서, 에- 자기 집 차가 스텔라 이상 되는 놈들 앞으로 나와”   

  

헐, 무슨 조건이 저래? 궁금했다. 군에서 그런 조건의 사람을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딜까? 조건이 그래서 그런지 왠지 부잣집 아들 같은 사람들이 우르르 튀어 나갔다. 정치군인은 그들을 군용 버스에 태우더니 지프로 에스코트를 하면서 사라졌다.      


‘낯짝 반반하다고 생각하는 놈들 앞으로 튀어나왓!’ 뭐 그런 게 있었으면 자신있게 손을 들고 나가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그런 사람을 뽑으러 오는 군인 아저씨는 없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제 스탠드에는 키가 180도 안 되고, 집도 강남이 아니며, 집에 스텔라 이상 되는 차도 없고, 서울대와 연고대도 못 다닌 ‘따라지’들만 남아 있었다. 인간 참 초라해지는 순간이었다. 사람을 그런 식으로 뽑아 가려면 미리 몰래 뽑아 가든지, 이 무슨 예의 없는 짓거리람! 다들 그런 생각을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 잔을 제게서 거둬 주시면 안 되실까요?


남은 ‘따라지’들은 숙소를 배정받고 다음날 간단한 신체검사를 받았다. 신체 이상자들은 군의관 면담 후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오랜 군대 생활을 끝내고 제대하는 얼굴로 보충대를 나갔다. 부러웠다. 지금까지 경험한 것만으로도 군대가 얼마나 무섭고 야만적인 곳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피할 재주가 없었다.      



군대 훈련이란 궁극적으로 타인을 살상하는 훈련이다. 종교의 가르침과 상반된다. 그런데 국가를 위해서 받는다? 그렇다면 국가가 자신이 신봉하는 절대자보다 더 상위의 존재란 말인가? 


최종적으로 입영 대상이 된, 결과적으로 따라지 중에서도 상 따라지들인 우리는 강당에 모여 군번을 부여받았다. 진짜 군인이 되는 순간이었다. 맨 앞에 기관병 한 명이 서 있었다. 기관병 옆에는 사채업자 일수 가방같은 황토색 세면 가방이 잔뜩 쌓여 있었다. 줄을 지어 기관병 앞에 가면 기관병이 군번을 딱 한 번 불러 주었다. 따라지가 복창을 잘하면 황토색 세면 가방을 하나 주었다.     

 

긴장해서 그런지 10명 중 1명 꼴로 복창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 순간 세면 가방을 나눠주던 기관병이 허공으로 날아올라 가슴팍에 2단 옆차기를 날렸다. 불쌍한 따라지는 강당 바닥에 고꾸라졌다. 키 크고, 대가리 좋고, 부잣집 아들들은 다 사라지고 따라지들만 남았으니 함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기관병은 다시 한번 군번을 불러 주었다. 줄을 선 채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심한 공포감을 느껴야 했다. 나도 그랬다.      


3*24**52 내 군번이다. 그때 딱 한 번 들었다. 그 뒤로 내 군번을 타인이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개인적으로 따로 시간을 내어 외운 적도 없다. 그런데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주민등록 번호는 가끔 헷갈릴 때가 있지만 군번이 헷갈렸던 적은 한 번도 없다. 폭력의 트라우마는 이렇게 무섭다. 


3일 뒤, 7사단으로 배치받았다. 군복으로 갈아입고 황토색 세면 가방을 들고 관광버스에 올라탔다. 60∼70명이 7사단으로 갔다. 사단 본부에 도착했다. 102보충대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것을 했다. 염병할. 다만 이번에는 레벨이 좀 낮았다. 타자 잘 치는 놈, 붓글씨 잘 쓰는 놈, 차트 글씨 잘 쓰는 놈, 뭐 그런 수준이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지만 해당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점점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빌어먹을 뽑기 행사는 나중에 훈련을 마치고 자대 가기 전에 잠깐 들렸던 연대본부에서도 했다. 다행히 그때는 해당이 되어도 손을 들고 싶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라 자괴감이 들지는 않았다. ‘집에서 돼지나 소 키우다 온 놈 있어?’ 뭐 그런 수준이었다. 해당이 된다고 해도 손을 안 들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해당되는 것도 없었다. 

     

내가 생활해야 할 최종 근무지를 향해 한 발 두 발 나아가는 과정은 내가 얼마나 쓸모없는 인간인지를 끊임없이 검증받는 과정이나 마찬가지였다. 배치받은 자대까지 무사히 간다는 것은 내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신학생에서 군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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