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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의 음악 Oct 13. 2021

훈련소, 종교 일치의 현장

성당이나 교회나 같은 예수님 믿는데 아냐?

화천에서 자동차로 20분 쯤 떨어져 있는 신병 교육대에서 4주간 훈련을 받았다. 같은 내무반에 신학생이 한 명 있었다. 엄청 반가웠다. 그 신학생은 교구 소속이 아니라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이었다. 학교는 서울이었다. 이름이 무척 신학생 다운 신학생이었다. 우리는 헤어진 형제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했다. 그 친구 덕분에 훈련소 생활이 덜 힘들었다. 


일요일이면 우리는 걸어 20분 거리에 있는 연대 교회로 미사를 보러 갔다. 군종 신부님이 그곳 교회로 미사를 하러 왔다. 아이러니하게도 교회와 가장 대척점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군대에서 가톨릭과 개신교가 종교 간의 일치를 이루고 있었다. 신자가 적다 보니 가톨릭은 한 개 사단에 군인 성당이 하나뿐이었다. 군종 신부도 한 사람뿐이었다. 개신교는 신자가 많다 보니 연대마다 교회가 있었다. 참고로 한 사단에는 4개의 연대가 있다. 신병 훈련소에서 사단 성당이 너무 멀다 보니 연대 교회 목사님이 자신의 교회에서 가톨릭 신자 훈련병들이 미사를 볼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던 것이다. 


연대 교회는 훈련소 담 너머로 빤히 보였다. 일요일 아침이면 미사와 예배가 한 교회에서 차례로 행해졌다. 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교회 일치 운동이 군에서는 현실적으로 매주 벌어지고 있던 셈이다.    

  

훈련소 입소 후 처음 맞이한 일요일. 8시 40분이 되자 기관병 한 명이 가톨릭 종교행사에 갈 사람들 행정반 앞에 모이라고 했다. 20명쯤 모였다. 우리는 훈련소를 나와 연대 교회로 행군해 갔다.     

군종 신부님은 서울 교구 신부님이었다. 신부님을 도와주는 군종병이 있었는데 원주 교구 신학생으로 광주 신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나와 프란치스코회 신학생은 군종 신부님에게 인사를 했다. 신부님은 우리가 훈련소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신부님이 우리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자 무척 기분이 좋았다. 우리가 귀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군종병은 사단 내에 있는 다른 신학생들 현황도 알려주었다. 10명 남짓 되었다.  

    

교회나 성당이나 같은 예수님 믿는데 아냐?


1주일 후 다시 일요일이 돌아왔다. 아침부터 미사를 하러 갈 생각에 기분이 마냥 좋았다. 그때 기관병 한 명이 내무반으로 들어오더니 ‘너, 너, 너’ 하면서 밖으로 불러냈다. 5명쯤 되었다. 나와 프란치스코회 신학생이 포함되어 있었다. 기관병은 우리에게 막사 뒤에 있는 재래식 변소 청소를 시켰다.     

  

미사를 가야 한다는 생각에 우리는 서둘러 청소를 했다. 얼른 끝내고 행정반 앞으로 가서 줄을 서야 했으니까.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다른 세 명을 독려해 가며 빛의 속도로 변소 청소를 했다. 끝내고 나자 옷에서 똥 냄새가 폴폴 났다. 상관없었다.      


손도 안 씻고 행정반 앞으로 달려갔다. 오 마이 갓. 이미 기관병 인솔 하에 가톨릭 종교행사 참석자들이 떠나고 없었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행정반 앞에 서 있었다. 기관병 한 명이 우리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9시 40분에 기독교 종교 행사 출발하니까 그때 가. 교회나 성당이나 같은 예수님 믿는데 어때?”     

순간적으로 ‘이런 무식한 놈'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영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 기관병의 말은 한 차원 더 높은 종교 간의 일치를 말하고 있었다. 미사도 교회에서 하고 있었으니 더 실감이 났다. 그렇지만 나는 개신교 종교행사에 따라 나가 예배를 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왠지 예배 때 목사님이 말하는 예수님은 내가 믿는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 같았다. 프란치스코회 신학생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안 가고 싶어 했다. 

     

그날 오후. 내무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행정반에서 호출이 왔다. 나와 프란치스코회 신학생을 부르는 호출이었다. 좁은 행정반에 들어서자 소대장과 기관병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한 채 서 있었다. 한 기관병이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송화기 부분을 손으로 막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소대장이 전화기를 들고 있는 기관병을 보며 말했다. 


“할 수 없지. 사실대로 말씀드려야지….”


그 말을 신호로 기관병이 내게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군종 신부님이었다. 미사에 안 와 걱정이 되어 전화했다고 했다. 따뜻한 목소리로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물었다. 눈물이 날뻔했다. 미사에 한 번 빠졌다고 군종 신부님이 친히 훈련소로 전화를 해 우리를 바꾸라고 하다니! 나와 프란치스코회 신학생과 차례로 통화를 한 신부님은 소대장을 바꾸라고 했다.      


훈련병들에게 그렇게 악랄하게 굴던 소대장은 안쓰러울 정도로 쩔쩔맸다. ‘그 두 신학생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감히 미사에 안 보냈냐’고 해 주면 좋을 것 같았다. 군종 신부님은 고맙게도 그 비슷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수화기를 든 소대장은 여차하면 ‘대가리’라도 박을 것처럼 굽신거렸다. 사단에서 온 전화인 데다 신부님은 대위였고 그는 중위였다.      


훈련소에서 미사에 못간적이 있다. 그러자 군종 신부님이 소대장에게 전화해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전화를 한 사람은 신부님이 아니라 군종병이었던 신학생이었다


그날 군종 신부님 전화를 받고 기분이 좋아진 것은 두말할 필요 없다. 다른 동료 훈련병들이 우리를 아주 ‘빽’있는 사람으로 쳐다보는 것 같아 으스대는 마음까지 일렁였다.       


다시 일요일이 되었다. 아침을 먹고 나자 행정반에서 나와 프란치스코회 신학생을 불렀다. 종교행사 나갈 준비를 하고 오라고 했다. 시계를 보니 8시였다. 행정반으로 갔다. 우리를 보더니 소대장이 말했다. 


“어디 가지 말로 여기서 난로불 쬐고 있다가 시간 되면 종교행사 가”


내무반에 있다가 어떤 기관병에게 끌려가 소재 불명 상태에서 노역을 하다가 종교행사에 또 못 갈까 봐 취하는 조치인 것 같았다. 우리는 따뜻한 행정반 안에서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잠시 뒤 가톨릭 종교행사에 참여할 사람들이 행정반 앞에 줄을 서기 시작했다. 우리도 줄을 섰다. 인솔을 맡은 기관병이 우리 두 사람 이름을 불렀다. ‘다른 놈들은 모르겠고, 니들 둘만 있으면 돼’하는 표정이었다. 뭔가 중요한 사람이 된 듯한 생각에 또 어깨가 으쓱해졌다. 비교하기 참 그렇지만, 102보충대에서 앞으로 튀어 나갔던 그 사람들의 마음이 그랬을까?    

  

숨은 이야기 하나. 

나중에 알고 보니 훈련소 행정반으로 전화를 걸어 소대장을 혼내 사람은 군종 신부님이 아니라 광주 신학교에 다니던 그 원주 교구 신학생이었다. 당시 그 신학생의 계급은 상병 2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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