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연의 음악 Oct 16. 2021

개고기를 못먹으면 신부가 못된다?

오늘은 나, 내일은 너

청소 담당 구역이 바뀌었다. 3학년 미화부장이 새 청소구역 안내문을 게시판에 붙였다. 살펴보니 개밥 담당이었다.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장 동물적인 본성이 강할 때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개밥 담당을 학부 3학년들이 맡아하고 있었다.      


신학교 운동장 한쪽 구석에 동물원처럼 제법 큰 우리가 있었다. 그 안에 10여 마리의 개가 살고 있었다. 한결같이 누런 똥개였다. 신학교 식당에서 나오는 음식물 찌꺼기로 키우는 개들이었다. 개밥 담당자가 되면 아침 청소 시간에 식당에서 개밥을 받아 가져다주고, 간단히 개집 청소를 해야 했다.     


개집이 거기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평소 잘 가지 않던 곳이라 자세한 사정은 몰랐다. 개밥 담당자가 되고 처음으로 수레에 밥을 싣고 개집 가까이 갔다. 밥을 싣고 가서 그런지 개들이 격하게 환영했다. 적어도 밥 주러 들어갔다가 개밥이 될 위험은 없어 보였다. 어릴 때 집에서 늘 개를 키웠고, 개를 좋아하는 편이라 별 부담도 없었다.      


오늘은 나, 내일은 너


철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몇 군데 밥그릇에 밥을 담아 배식을 했다. 신학교 개들이라 그런지 서로 싸우지도 않고 사이좋게 잘 먹었다. 밖으로 나와 개들이 밥 먹은 모습을 한동안 쳐다보았다. 맛있게 먹는 모습에 뿌듯했다. 그때 철장에 걸려 있는 작은 나무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팻말에는 누군가 장난으로 써 놓은 것 같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HODIE MIHI, CRAS TIBI’     


라틴어였다. ‘호디에 미히, 끄라스 띠비’라 읽었다. 이 글귀가 적혀 있는 곳이 인근에 또 있었다. 신학교는 대구 교구청과 붙어 있었다. 외출날이 아니면 학교 밖으로 나갈 수 없었지만 저녁 산책 시간에는 신학교와 연결된 길을 따라 교구청과 작은 공원처럼 꾸며져 있는 성모당 주변을 산책할 수 있었다.    


교구청 주변을 산책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성직자 묘지로 연결되었다. 묘지 들어가는 입구 양쪽에 기둥이 서 있었다. 왼쪽 기둥에는 ‘호디에 미히(HODIE MIHI)’라 적혀 있었고, 오른쪽 기둥에는 ‘끄라스 띠비(CRAS TIBI)’라 적혀 있었다. 우리말로 해석하면 ‘오늘은 나, 내일은 너’라는 뜻이다. 풀이를 하자면, ‘오늘은 내가 죽어 여기 묻혔지만, 내일은 니가 죽어 묻힐 것이다’ 뭐 그런 뜻이다. 어찌 보면 조금 섬뜩한 글귀였다. 산 사람들을 향한 죽은 자들의 악담인 셈이었으니까. 물론 가톨릭 신자들은 이 글귀를 묵상의 주제로 삼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았지만.       


아무튼, 성직자 묘지 입구에 적혀 있는 그 글귀를 누군가 작은 나무 판에 옮겨 적어 개집 창살에 붙여 놓았던 것이다. 굳이 풀이 하자면 ‘오늘은 내가 잡아먹히지만, 내일은 니가 잡아먹힐 것이다’ 뭐 그런 뜻쯤 되겠다.      


신학교 3학년 시절 개밥 담당이었던 나는, 제법 개들과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내가 밥을 줬던 개들은 부활절이 지나면 반으로 확, 줄었다


‘설마 신학교에서 그런 야만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 정서로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1993년) 개고기는 지금의 육개장만큼이나 흔한 음식이었다. 자연히 신학생들도 개고기를 즐겨 먹었다. 내가 개밥을 주어 키우던 그 개들은 실제로 식용으로 키우는 개들이었다.  

  

개고기를 못 먹으면 신부는 될지 몰라도 주교는 못 된다


아무 때나 개고기가 나왔던 것은 아니다. 그럴 만큼 물량(?)이 많지 않았다. 내 기억에 부활절과 학장 신부님 영명 축일 날 개고기가 나왔다. 당시 주방장 수녀님이 개고기 요리 전문가라는 소문이 돌았다. 개고기를 마치 쇠고깃국처럼 맛있게 끓인다고 했다.      


참고로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먹어보기는 했다. 별로 맛있지 않았다. 특별히 동물을 사랑해서 안 먹은 것은 아니었다. 육고기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신학교 가기 전에는 돼지고기도 안 먹었다. 신학교에 갔더니 돼지고기가 하도 자주 나와 돼지고기를 안 먹으면 먹을 게 없어 먹기 시작했다.   

  

어느 부활절이었다. 저녁인지 점심인지 아리송하다. 개고기가 나왔다. 거의 모든 신학생들이 개고기를 좋아했다. 물론 나는 먹지 않았다. 전교생 150여 명 중에서 개고기를 안 먹는 신학생들이 20명 정도 되었다. 그들을 위해 주방장 수녀님이 쇠고깃국을 끓여 식당 한가운데 한 들통 가져다 놓았다. 나를 포함해 개를 사랑하던(지금 기준으로) 사람들은 그 쇠고기 국을 먹었다. 물론 나중에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것도 개고기였다고 했다. 완전 육개장 맛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신학생들 사이에서 ‘개고기 못 먹으면 신부 못 된다’는 말이 있었다. 그 말이 신빙성이 있던 시절이 있었다. 개고기를 안 먹는 신부가 한 명도 없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그러다가 언젠가 개고기를 안 먹는 신학생이 사제 서품을 받아 신부가 되었다. 자연히 ‘개고기 안 먹으면 신부 못 된다’는 말이 성립되지 않았다. 그러자 말이 바뀌었다. ‘개고기를 안 먹으면 신부는 될 수 있어도 주교는 못된다.’ 맞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그 시절, 좀 많이 야만적이었다.      


부활절 점심 식탁에 개고기가 나왔다. 요리를 기막히게 해서 마치 육개장 같았다


천주교와 개고기는 남다른 관계가 있다. 조선 시대 천주교는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2만 명 이상의 신자들이 단지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었을 정도다.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산속으로 도망을 다녔다.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으니 화전을 일구거나 옹기를 구워 팔았다. 그러다가 관군이 쳐들어오면 또 도망을 갔다. 


그때 개는 귀중한 식량자원이었다. 관군을 피해 늘 도망 다녀야 했던 신자들이 덩치가 큰 소를 끌고 다닐 수는 없었다. 발각이 되기도 쉬웠고, 잡히기도 쉬웠다. 개는 달랐다. 덩치가 작아 데리고 다니기 좋았다. 아무거나 잘 먹어 키우기도 쉬웠다. 새끼도 많이 낳아 가성비도 좋았다. 그런 이유로 개를 몇 마리 데리고 다니다 식량이 부족하면 잡아먹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사명감을 갖고 개고기를 먹는 신부들이 있었다. 그런 신부들은 개고기를 못 먹는 신학생을 사명감이 부족하고 심지어 신앙이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쳐다보기도 했다.      


지금은 어떨까? 


요즘 신부들을 보면 점점 목사들처럼 되어 가는 것 같다. 술도 안 마시고, 담배 피우는 신부들도 보기 힘들다. 개고기를 안 먹는 것도 당연하고.      

매거진의 이전글 훈련소, 종교 일치의 현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