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케티
분명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이국의 낯선 마을에서, 내 이름이 누군가의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해지고 있었다. 그것이 내 귀에 들린다는 것이 참 신기했다.
인도의 함피Hampi란 곳이었다. 나는 약 30분 전에 함피에 도착했다. 1994년 12월 24일,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8년 전이다. 버스 두 대가 동시에 설 수 있는 것이 전부인 아주 작은 버스 정류장이 있는 마을이었다. 인도의 시골 마을은 대개 버스 정류장 크기와 비례했다. 버스 정류장이 크면 마을도 컸고, 작으면 작았다. 버스 정류장이 작은 만큼 함피는 무척 작았다.
인도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함피는 거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인도 대륙의 배꼽 같은 곳이었다. 인공 건축물인 여러 힌두교 신전들과 신이 만든 자연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그런 곳이었다.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해가 함피를 에워싸고 있는 돌무더기 산 위 한 뼘쯤 되는 곳에 걸쳐져 있었다.
반사적으로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보았다. 케티였다.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인도 여자처럼 머리에 노란색 스카프를 쓰고 하늘거리는 파란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케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케티의 이름을 소리 내어 말했다. 함피에서 케티를 만날 것이란 생각은 했다. 하지만 그렇게 빨리 만날 줄은 몰랐다. 사흘 전, 바다미에서 케티와 헤어질 때 조금 애틋한 마음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길에서 만난 사람은 길에서 헤어진다’는, 당시 여행자들 사이에서 떠돌던 주술 같은 이야기에 제법 의미를 두고 있던 때였다. 케티는 함피로 간다고 했다. 케티와 헤어지고 사흘 뒤, 나는 함피에 도착했다.
케티를 일부러 찾아다닐 생각은 없었다. 다만 생각했던 것과 달리 함피가 너무 작아 어쩌면 만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함피가 너무 작아 볼 것 다 보고 이미 떠났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학가 자취방 같았던 케티의 숙소
“차를 만들어 줄게."
케티는 자기 숙소로 가서 차를 마시자며 내 팔뚝을 잡아끌었다. 새다리처럼 가느다란 그녀의 손목은 무처럼 하얗고 차가웠다.
동네가 워낙 작다 보니 몇 걸음 안 가 그녀가 묵고 있다는 게스트하우스가 나왔다. 디귿자 모양의 단층 시멘트 건물이었다. 길 쪽으로 식당이 붙어 있었고, 안쪽으로 작은 방들이 잇달아 있는, 전형적인 싸구려 게스트하우스였다. 식당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며 얼핏 보니 좀 전에 내가 배낭을 던져 놓고 나온 숙소가 저만치 보였다.
케티의 방은 작았지만 창문이 있어 환했다. 내가 구해 놓은 숙소는 가장 싼 방이라 창문이 없어 낮에도 불을 켜지 않으면 캄캄한 굴 속 같았다. 케티의 방은 여행자의 방이라기보다 대학생 자취방 마냥 여러 가지 물건들이 방바닥을 차지하고 있었다. 함피에서 몇 달째 살고 있는 사람의 방 같았다.
케티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버너의 불을 피우고 물을 끓여 차를 만들어 주었다. 발효 홍차에 우유와 설탕을 넣고 끓여낸 인도 ‘짜이’였다. 달콤하고 고소했다. 케티는 함피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다며 이런저런 그림들을 보여주었다. 대학노트만 한 크기의 공책에 다양한 그림들이 연필로 그려져 있었다. 함피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나지막한 돌무더기 언덕들과 신전의 여러 조각상들이었다. 결코 잘 그렸다고 할 수 있는 그림은 아니었지만 정성만큼은 충분히 느껴졌다. 케티는 그동안 주변 신전들을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내일 비루파크사 신전에 갈거야. 같이 가. 비루파크사는 이곳 사람들이 부르는 시바의 다른 이름이래. 신전 앞에 50미터가 넘는 고푸람(힌두교 신전의 출입구 역할을 하는 건물)이 있어. 온통 아름다운 조각으로 뒤덮여 있어. 오늘도 갔다 왔어. 내일 가서 그림을 마저 그릴 생각이야.”
케티는 비루파크사 신전의 고푸람을 그린 그림을 보여주였다. 전형적인 힌두교 신전의 고푸람처럼 밑은 넓고 위로 올라가면서 좁아지는 사각형 탑 모양이었다. 케티가 보여준 것은 반쯤 완성된 그림이었다.
사철 기온 변화가 거의 없는 남인도라 더웠지만 그래도 겨울이라 금방 어둑해졌다. 마치 몇 년 만에 만난 오누이처럼 수다를 떨든 우리는 잠시 뒤 저녁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때 묻은 팬티만 입은 대여섯 명의 인도 꼬마들이 숙소 앞 골목에서 자지르지는 비명을 질러 대며 골목을 내달렸다.
숙소에 딸린 식당으로 들어가 탈리를 두 개 시켰다. ‘탈리’란 우리식으로 하면 인도 ‘백반’쯤 된다. 식당은 제법 넓고 깨끗했지만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주문한 음식은 금방 나왔다. 네모난 식판에 훅 불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찰기 없는 밥과 샤브지(감자와 약간의 야채에 카레맛이 나는 맛살라를 넣고 기름에 볶음 다음, 물을 붓고 삶아 조린 것), 달(인도산 노란 콩으로 만든 죽 비슷한 것), 보라색 양파와 생무 두어 조각, 브로콜리 볶음 그리고 배춧국 맛이 나는 인도식 국이 담겨 있었다. 탈리는 딸려 나온 갖가지 반찬들을 밥 위에 얹은 뒤 비벼 먹으면 된다. 은색 스텐 식판에 담긴 탈리는 무척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내 경험에 따르면 탈리는 인도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더 맛있었다. 배가 고팠던 내가 숟가락으로 막 밥을 비비려고 하는데 케티가 말했다.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븐 줄은 알지?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여기 식당 주인아저씨가 뒷마당에 모닥불을 피워놓았데. 거기 가서 먹지 않을래? 불편하면 그냥 여기서 먹어도 되고. 난 아무래도 좋아.”
케티의 말에 나는 그날이 크리스마스 이브임을 알았다. 한 여름인데다 인도와 크리스마스가 잘 매치가 되지 않아 그날이 크리스마스 이브인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 여름밤의 크리스마스
케티의 말에 1년전 크리스마스 이브가 생각났다. 1년전 오늘, 나는 신학교에서 쫓겨나게 되었음을 알리는 통지서를 받았다. 참 타이밍 기막혔다. 나는 신부가 되고 싶어 신학교에 들어가 사제수업을 받았다. 학부 4년과 군대 3년까지 포함해 7년을 가톨릭 신학생 신분으로 살았다. 그러다가 1년전 크리스마스 이브에 기숙사에서 짐을 빼라는 통지서를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곧바로 인도로 왔다.
일반적인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이라면 신학교에서 나온 뒤 먹고 살 궁리를 해야 하는 것이 맞다. 신학교에서 공부는 많이 했지만 밥을 벌어먹고 사는 데 필요한 것은 전혀 배우지 않았다. 사실 신학교에서 그런 것은 배울 필요가 없었다. 신학교를 졸업하기만 하면 사제 서품을 받아 신부가 되고, 신부가 되고 나면 먹고사는 문제는 절로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일반 대학의 4학년 생들이 토익이나 토플을 공부하고, 이런저런 자격증을 따느라 바쁜 시간을 보낼 때, 나는(다른 신학생들도 다 그랬지만) 여전히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들에 대해 고민했다. 그런 고민들은 밥벌이를 하는 데는 하등 쓸모가 없는 고민들이었다.
나와 같이 신학교에서 나온 친구들은(학부 졸업과 함께 10여 명이 한꺼번에 자의 반 타의 반 신학교에서 나왔다) 일반적인 정신세계를 조금이라도 갖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들은 곧바로 독서실로 들어가더니 공부를 했다. 몇몇은 편입 시험을 준비했고, 몇몇은 대학원 진학을 준비했다. 나는 그들의 배웅을 받으며 인도로 왔다.
“당연히 모닥불 가에서 먹어야지. 크리스마스 이브잖아.”
내 말에 케티는 활짝 웃으며 식판을 들고 일어났다. 크리스마스 이브라 그런지 케티는 좀 설레는 표정이었다. 나는 여덟 밤만 자고 나면 서른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지만 케티는 이제 스물 다섯이었으니 크리스마스는 설레는 날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크리스마스이브를 즐길 준비가 된 연인처럼 식판을 들고 사이좋게 식당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