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실에 갔다.
머리가 너무 자라서 눈을 찔렀기에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전반적으로 다듬고 나니 머리가 훨씬 차분해지고 좋았다.
평소 안경을 쓰는 데 앞머리가 눈을 찌를 것 같은 애매한 길이감이 있어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앞머리만 살짝 짤라주세요."
그리고 미용사분은 알았다고 하시고는 댕강 짜르셨다.
확 틔인 시야를 가지고 미용실을 나왔다.
나는 몹시 당황했다.
살짝만 자르다의 다른 뜻이 있던가.
왜 항상 미용실에서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는 것인가.
문특 궁금해졌다.
수업에서 배운 절대적 상대와 상대적 절대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생각을 해보면 '살짝'이라는 말이야말로 정말 형이상학적인 말이다.
살짝의 개념은 내 안에 있는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
또한 상대방에게도 살짝의 개념은 내재하고 있지만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살짝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저 정도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뿐이다.
소통의 오류는 나의 '살짝'과 너의 '살짝'과 같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세계가 단순하면서 복잡하다는 것이다.
사실 신학공부를 안했으면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겠지만 덕분에 알게 되어서 머리가 터지는 중이다.
세상은 많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 많은 사람들은 각각의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 수많은 정신세계의 집합이 세상이 되는 것이다.
정신세계들은 서로 합하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똑같은 인간이라고 해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상대성이 나타나는 데 나의 머리가 깨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대성이 단순히 다른 생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것을 보아도 서로 다르게 인식하게 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상대성 때문이다.
똑같은 어린 아이를 보더라도 누구는 '너무 귀엽다, 나도 키우고 싶다' 라고 생각하는 반면에 누구는 '보기에는 예쁘지 실제로 키우면 일이다!'라고 생각한다.
이때에 이 두사람은 '어린아이'라는 개념을 공유하고 있으나 '어린아이'를 인식하는 방식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그렇다. 하늘 아래에 같은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나와 너가 같은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그 인식의 범위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으니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낯설더라도 당연하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소통이란 공통과 차이를 알아가는 과정인 셈이다.
앞으로 '너와 같은 생각이야'라는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 알아볼 것 같다.
나와 같지만 같은 수 없기에 상대의 말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될 것 같다.
미용실 원장님과 보다 많은 소통을 했으면 '살짝'에 대한 당황함은 없었을 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