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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렌더 이야기꾼 Jun 16. 2020

코로나 이후의 세계는 어떻게 변할까?

<엘레시움>으로 보는 미래사회

작은 변화, 큰 변화

코로나 19의 발발은 전 세계 인구들의 생활양식을 하나로 모으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람들은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바이러스의 전파로 인해서 함께 하기보다는 멀어지는 관계가 형성이 되었다.


개인 간의 거리는 진짜 멀어졌을까?

집에 가는 길에 상가들을 쳐다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생활 반경이 축소되어서 지역상권에 부정적인 결과가 미쳤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되고 있었다. 나 역시도 간만의 외출이었다. 시장에 가서 장을 보고 오던 길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개인 간의 거리는 진짜 멀어졌을까?


여전히 술집은 붐비는 데가 많았다. 만석의 술집 옆으로 텅 빈 가게가 보였다. 배달전문음식점이었는데 사장으로 보이는 사람 홀로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이른 시간대라서 한산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의 멀어짐은 반동을 일으켜 다른 의미의 연합을 추구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미래 사회는 격변할 것이다. 이례적인 큰 재앙은 사람들을 통솔하는 거대한 지휘권을 쥐고 있는 셈이다. 지독한 개인주의로 갈 것 같다는 생각이 언뜻 들지만 또 한편으로는 생활양식의 재편을 불러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다른 모습으로 계속 모일 것이고, 살아갈 것이다.


고대에서 중세로, 다시 근대로, 다시 현대로 넘어갈 때마다 인류는 큰 변화를 겪었다. 옛날로 회귀하려는 모습도 보이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새로운 것은 없다. 옛 것으로의 회귀도, 새로운 양상도 결국은 재구성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간다. 과거의 모습에서 서서히 변해갈 뿐이다.


<엘리시움>의 미래사회

<앨리시움>은 미래의 어떤 때를 담고 있다. 미래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살고 있고, 그 모습은 현재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여전히 사회를 구성하고 있고,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살아간다.


다른 모습이라고 한다면 과학의 발전으로 더 이상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죽음을 무수히 연장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더 이상 아픈 사람과 죽는 사람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의료기기 안에 들어가면 인류의 모든 질병은 고쳐진다. 새로운 시대이자 유토피아가 펼쳐진 것이다. 하지만 인류는 옛 모습에서 완전히 탈피한 새로운 인류가 되지는 못했다.


과학의 혜택을 받는 부류는 지구 위에 있는 우주정거장에 살고 있다. 지구에 남은 자들은 병들고, 가난하고, 힘겨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다. 남겨진 자들은 계층에서 밀려난 자들이었고 그 결과 행성에 남겨졌다.


주인공 맥스는 하늘을 바라보며 우주정거장이자 유토피아인 엘리시움에 갈 날을 꿈꾼다. 하지만 그 날은 힘겨운 오늘에 가려진다. 우주 위의 사람들은 함부로 지구에 남겨진 자들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땅히 자신들의 권리를 누린다. 불법적으로 우주선을 만들어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는 남겨진 자들을 격추시킬 뿐이다.


그 속에서 맥스는 세미 히어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개인의 이익이 목적이었지만(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웠음) 그들만의 계층 사회 속으로 기어코 들어간다. 그리고 그들만의 혜택인 엘리시움을 모두의 것을 확장시키는 데 성공한다.


미래사회

미래사회라는 것도 현재의 사회에서 비롯된다. 과거가 모여 현재의 내가 되듯이. 어쩌면 다가올 미래도 인간의 본질적인 것까지 바꿔버리지는 못 할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을 강타한 팬더믹은 우리들을 흔들어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 것이다. 우리가 붙잡고 있던 관념들, 습관들, 생활양식들도 죄다 흔들릴 것이고 모습을 달리 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우리다.


현재의 개념이 앞으로 다르게 해석이 될 터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바뀔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될 것 같다. 엘리시움이 처음 도래했을 때 아마도 전 세계 사람들은 환영했을 것이다. 새로운 인류의 시작 앞에서 모든 갈등은 사라지고 완전한 유토피아를 모두가 누릴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엘리시움은 그들만의 것이 되었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저 편에서 힘겹게 오늘을 살아간다. 어린 맥스가 하늘을 바라보던 엘리시움은 결코 그와 가까워지지 못했다. 오히려 양극화는 거대해졌고, 이 편과 저 편의 간극은 팽창될 뿐이었다.


다가올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그 미래의 변화된 생활이 나에게 긍정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나의 계층이 더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살아갈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기에 세계가 두 동강 나고 갈라진다 해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어쩌면 포기하지 않는 인간 너머의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맥스는 어릴 적 친구의 딸의 목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버렸다. 숭고한 그의 희생이 아름답지만 그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지극히 가난했고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다가오지 않는 미래는 두려움이다.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을 더욱 돌보고 주위를 살핀다. 오늘의 자리에서 묵묵히 견디며 내일을 맞이한다. 내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오늘 내가 이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p.s. 처음 브런치를 시작할 때에는 지금보다 많은 글을 쓸 것이라 다짐했지만 오늘의 과제들에 묻혀서 쉽지가 않네요;; 그래도 열심히 배우고 사유하고 그것을 기록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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