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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렌더 이야기꾼 Oct 07. 2020

몬스터 콜스


독전포인트1:  몬스터의 등장, 서사의 시작 

아이와 어른의 경계는 어디일까?

이 책을 읽다 보면 색다른 답에 도달해 있음을 알게 된다. 책에는 한 소년의 평범한 일상에서 시작이 된다. 코너 오말리는 죽음과 가까이에 있는 엄마와 함께 사는 소년이다. 코너는 스스로 하는 일이 많다. 아침 차려 먹기, 쓰레기 내다 놓기 그리고 엄마 병 간호까지. 홀로 씩씩하게 감당하는 소년을 보고 있으면 마음 한 켠에 소년에 대한 감정이 싹트게 된다. 대부분 동정과 연민에 기반한 감정들이다. 더구나 학교에서 동급생들에게 맞는 장면은 코너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폭발시킨다.  


평범해 보이던 코너의 일상은 엄마의 병마와 학교폭력의 피해자라는 이면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서사의 흐름 속에서 독자들 역시 그 코너의 심리에 충분히 몰입할 수 있는 지점이 생긴다. 그 지점은 이렇게 힘든 코너가 묵묵히 견뎌 나가는 현실을 의미한다. 그 현실은 균열을 맞이하게 되는 데 코너를 찾아온 몬스터를 통해서 균열은 일어나게 된다. 그 몬스터가 들려주는 이야기로 인해 일상과 이면의 대립은 점점 더 커져간다. 


독전포인트2: 이항대립의 가치

자신을 찾아온 몬스터에게 그렇게 따뜻하지는 않게 대하는 코너지만 몬스터 역시 만만치 않다. 다소 거칠게 코너에게 제안을 한다. 자신이 세 가지의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네 번째 이야기는 코너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는 것이다. 코너는 받아들이지 않지만 몬스터는 계속 찾아와 이야기를 전해준다. 12시 7분이면 나타나는 몬스터를 달갑게 여기진 않지만 코너는 몬스터의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어간다. 


하지만 몬스터의 이야기는 어딘가 이상하다. 누가 봐도 악한 쪽인 계모와 왕자 이야기, 누가 봐도 못된 약제사와 목사 이야기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소년의 이야기까지. 독자 역시 의문을 가질 만한 다소 애매한 이야기들이다. 이야기 구성 자체는 평범한 동화가 가지고 있는 구성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선과 악의 대립구조, 분명한 교훈 등의 필수 구성요소가 모두 등장한다. 차이가 있다면 선과 악의 대립구조가 평범한 동화와 다르다는 것이다. 

코너가 묻는다. ‘당연히 계모가, 당연히 약제사가 벌을 받지 않았냐’고 하지만 몬스터는 대답한다. 왕자와 목사가 벌을 받았다고. 이렇듯 몬스터가 들려준 이야기는 평범한 동화 속 극명하게 갈리는 선악의 구조가 없다. 악한 듯 보이던 계모는 선한 듯 보이던 왕자보다 덜 악했다. 계모의 지나친 탐욕은 왕자의 살인보다는 덜 악한 것이었다. 신념을 버린 목사보다는 괴팍한 성격의 약제사가 더 올곧았다. 이야기가 주는 첫번째 균열이다. 


선과 악을 떠올린다면 대부분은 반대 지점의 두 개념으로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선과 악은 그 차이가 우리의 생각만큼 극명하지 않다. 몬스터가 들려준 이야기는 바로 이 차이에 대한 것이었다. 인간은 이항대립적 차이로 모든 것을 이해한다. 흑은 백이 있기에 분명하게 이해가 된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흑과 백의 대립하는 차이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항대립적 이해만으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 전체가 악인 것도, 전체가 선인 것도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로는 한 개의 눈으로만 보기 때문에 제대로 보기 어렵다. 


독전포인트3: 진실의 탈각

엄마의 병세가 악화되고, 코너는 자신과 정반대의 성격의 외할머니와 같이 살게 될 위기에 처한다. 정말 싫은 현실이었지만 코너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코너는 엄마와의 대화를 통해서 오래된 주목에 대해 알게 된다. 주목은 오래된 나무이자 암을 치료할 수 있는 성분을 가지고 있다. 코너는 주목인 몬스터를 떠올리게 된다. 어쩌면 엄마를 구할 수 있는 해답을 몬스터가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엄마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그 날에 코너는 몬스터에게 달려간다. 어머니를 구해달라고 말하는 코너에게 몬스터는 네 번째 이야기를 요구한다. 


코너가 계속해서 꾸던 악몽에 대해 말할 시간이 다가왔다. 엄마가 아픈 이후로 계속해서 꾸던 꿈은 같은 장면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쉽게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몬스터가 꿈 속의 장면을 실제로 재연함으로 코너는 꿈 속이자 현실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와 직면하게 된다. 코너의 꿈 속에서는 무너지는 절벽 끝에서 매달린 엄마가 등장한다. 코너는 엄마의 손을 잡고 있고, 엄마는 자꾸만 미끄러진다. 엄마의 손을 결국 놓친 코너는 절망한다. 현실에서 똑같이 재연된 꿈으로 코너는 무너진다. 그런 코너에게 몬스터는 다가와 말한다. 코너 안에서 두번째 균열이 일어난다. 그 균열은 코너 안의 진실을 불러일으킨다. ‘진실을 말하라’ 몬스터의 재촉에 결국 터져버린 코너의 진실은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어. 엄마가 죽을 거라는 걸 알지만 다 끝나버렸으면 좋겠어’ 였다. 코너는 자신을 자책하고 있었다. 엄마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힘겨웠기에 코너의 진실은 말할 수 없는 진실이었던 것이다. 몬스터는 그것이 코너의 진심이라고 알려준다.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과 엄마의 마지막을 바라는 마음이 같이 공존할 수 있다고 알려준다. 


코너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악인이었지만 악인이 아니었던 이야기들도, 모두에게 보이지 않던 아이의 이야기도 그리고 자신의 꿈에 대한 이야기도 전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몬스터는 지쳐버린 코너에게 괜찮다고 말해준다. 그렇게 코너는 주목나무 아래서 잠이 든다. 그리고 코너를 찾던 외할머니가 코너를 데리고 엄마를 향해 간다. 이제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엄마의 임종 앞에서 코너는 외할머니와 화해를 하게 된다. 너무 다른 서로지만 공존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조금씩 코너는 이야기를 받아들인다. 그렇게 이야기를 받아들인 코너는 엄마의 마지막 순간 앞에서 자신의 진심을 전할 수 있게 된다. ‘떠나지 마요, 엄마’ 코너의 진심은 엄마에게 전해지고 만다. 


총평

이 책에서는 동화 속 마법 같은 이야기가 없다. 이상한 이야기들만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다 보면 코너처럼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코너를 구하려 온 것이라고 말하던 몬스터는 엄마를 살려주지 않았다. 대신 코너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뿐이다. 그 이야기가 코너의 내면으로 들어와 균열을 만들었고, 그 균열은 코너가 내면의 진실에서 온 죄책감으로 자신을 나쁜 아이라고 여겼던 그 인식을 깨트린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변하는 시기는 따로 없을지 모른다. 모두가 아이이면서 모두가 어른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탈각하는 존재이고, 탈각 중인 존재이다. 애벌레의 탈각은 연약한 살을 터트릴 만큼 고통스럽다. 어쩌면 인간의 탈각 역시 고통의 순간들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모두가 선이면서 동시에 악일 수 있는 진심을 담고 살아가는 복잡미묘한 존재들이다. 코너의 이야기는 그런 의미에서 어른과 아이 모두에게 좋은 이야기이다. 아직 아이를 벗어나지 못한 어른도,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 그 모두에게 필요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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