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럭시21 첫 번째 전화

갤럭시21을 산 날, 나는 죽기 직전이었다.

by 댜니

장장 5년을 쓴 핸드폰을 바꿀 때가 되었다. 갤럭시21이 나온 순간에도 내 핸드폰은 갤럭시7이었다. 그럼에도 나에게는 적당한 기종이라고 생각했다. 핸드폰을 바꾼 이유는 그저 주변의 종용과 얼마 남지 않은 생일선물로 적당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새 핸드폰은 생일선물 겸 성난 민심을 잠재우는 토템에 불과했다. 얼마나 비싼 값이든 약정을 끼지 않고 기계값만 깔끔하게 긁으려던 계획과는 달리 판매직원은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정오가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쪽의 열의만큼 나는 피곤했고 대화는 지지부진하게 돌고 돌았다.


- 고객님, 다시 한번만 설명해드릴게요. 정확히 이해하셨으면 좋겠어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사실 그때 나는 정확하게 이해된 상태였다. 오죽했으면 마스크 아래로 그의 말을 조용히, 똑같이 웅얼거리고 있었을까. "100만 원만 넘기면 더 할인이 되기 때문에 100만 원에서 딱 10만 원 모자란 이 모델을 사면 오히려 더 손해고 이 모델에 추가 액세서리를 사서 100만 원을 넘기고 할인 혜택을 받으라." 이 말을 5번 정도 들었을 때쯤 피로와 짜증이 한숨으로 뱉어져 나오는 게 느껴졌다. 반면 직원은 여전히 열정적이었다. 눈이 그렇게 반짝거리며 일하는 사람은 오랜만에 본 것 같았다. 그러니 나의 항복으로 끝낼 수밖에. 예상치 못한 버즈라이브와 사은품으로 받은 무거운 세제 세트, 유심을 방금 옮긴 새 핸드폰을 들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아주 쨍쨍한 햇빛 아래 나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갤럭시21. 울트라도 플러스도 아니고 그냥 갤럭시 21 기본 모델을 사던 날은 이렇게 생생하다. 의미 없는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들었던 귀찮음도, 바깥에 나가 있는 시간이 길어져서 느껴지는 피로도, 계획대로 되지 않던 짜증도, 이유 없이 울고 싶었던 기분도. 모든 게. 그 와중에 집으로 가는 버스는 5분 정도 기다려야 한다. 5년 만에 바뀐 핸드폰을 들고 처음으로 무언가를 할 시점이 온 것이다. 나는 12시가 지나기도 전에 이미 만신창이가 된 기분으로 집 근처 병원에 전화를 해 예약을 잡았다.


- 안녕하세요. 정신건강의학과죠? 초진 예약 좀 잡으려고요.


갤럭시 21을 산 날, 나는 죽기 직전이었다. 그렇다고 죽이려던 사람이 그 판매직원은 아니었다. 판매점에 발을 들이민 처음부터 새 핸드폰을 손에 쥐고 나오는 순간까지 이 핸드폰이 나의 마지막 핸드폰일 것이라는 예감을 안고 있었으니까. 나는 이미 몇 주 전부터 하루 종일 무료했고 피로했고 우울했다. 소파에 가로누워 티비를 보다가도 울고 밥을 먹다가도 울고 책상에 앉아있다가도 울었다. 이유 없이. 이유는 전혀 없이. 모든 생각이 흐릿한 와중에 완벽한 문장으로 끝맺음된 딱 한마디 말만 고장 난 테이프처럼 되풀이되었다.

죽고 싶다. 다 끝내고 싶다.


죽이려는 사람과 죽으라는 사건 없이 일상처럼 우울에 잠식되어가다가 정말로 죽기 직전이다 싶었을 때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뻗쳐왔다. 다행이게도 그런 예감은 좌절이나 공포, 불안보다는 각성이 되었다. 심리학 4년 배우면서 등록금을 허투루 쓴 건 아니라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지만 결국 내가 지금 정상은 아니구나 확신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함부로 죽고 싶다는 말을 쓰지만 그만큼 함부로 죽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지금 나 정말 이상하구나.


전공을 심리학으로 두면서 그래도 남들보다는 자기 인식이 잘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 자신감이 지금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생각보다 나를 잘 모르고 내가 아는 거라고는 정신질환 병명 몇 개와 그에 딸린 진단 기준 수두룩뿐이었다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몇 주 동안 주요 우울장애의 진단 기준에 모두 해당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괜찮다는 말을 내뱉었던 것은 진심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은 줄 알았고 남들도 다 이 정도는 견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니 나는 전공생이라는 타이틀 외에 남들과 다를 바 하나 없는 우울장애 환자였을 뿐이었다. 하나 전공생이라 다행인 건 이상하면 병원에 가서 약 먹으면 된다는 편견 없는 지식이 있다는 것. 그래서 5년 만의 새 핸드폰, 첫 전화의 영광은 정신건강 의학과에 넘겨졌다.


내가 정말로 이상하다고 느낀 날, 내 상태는 하나하나가 전부 선명하다. 새 핸드폰을 손에 쥐고 당장 모든 게 끝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햇볕 아래 서있는 것만으로도 지친 몸으로, 차분하게 초진 예약을 잡으며 속으로는 간절함이 어떻게든 닿기를 바랐다.


그 무엇도 죽이려들지 않지만 나 좀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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