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말을 할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by 댜니

심리학과생들은 별 일이 없어도 체험과 예방 목적에서 상담을 자주 받는다. 시간표 사이에 상담 시간이 꼭 포함되어 있고 나도 아무렇지 않게 상담을 받은 학생이었다. 하지만 상담을 매년 몇 달 동안 받은 것과 별개로 병원은 처음이라 조금 낯설었다. 딱 생각한 대로 평범한 개인병원의 모습과 같아서 더 의외였다고 해야 하나.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점에서 스쳐 지나가며 배웠던 놀이치료실이 떠오르기도 했다. 치과처럼 편안한 분위기의 노래가 나오고 소아과처럼 은은한 등이 켜져 있고 이비인후과처럼 넓고 푹신한 소파가 늘어선 이곳은 분명 정신건강의학과, 일명 정신과 병원이었다.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부터 아줌마, 아저씨, 학생들까지 서로에게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고 할 일을 하며 차례를 기다리는 것도 그저 인기 많은 동네 병원의 모습과 같았다. 나는 그 사이에서 은근히 긴장하며 초조해했다. 선입견도, 편견도 없으면서 뭘 그렇게 긴장했냐면 첫 질문이 될 "어떻게 오셨어요?"에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맞을지 도저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할 말을 고르고 골라도 뭔가 정확한 말이 아닌 것만 같았다. 이렇게 말해야 하나, 저렇게 말해야 하나. 남들은 어떻게 말할지 대충 알 것 같은데 내가 굳이 그렇게 말해도 될까? 그래도 나름 이 쪽 전공생인데. 근데 전공생인 걸 말하는 게 도움이 될까 아닐까.


말 그대로 잡생각. 쓸 데 없는 생각이지만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다. 주로 받았던 상담은 상담가의 시간 50분을 내가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11시 예약이 잡혀있다면 노쇼를 하지 않는 이상 12시까지는 상담을 해야만 한다. 50분 중 40분을 침묵으로 채워도 그 나름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상담이다. 하지만 병원 진료는 조금 다르다. 내가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진료시간은 밀리게 되기도 하고 상담으로 본질적인 의미를 찾는 것만큼 약의 효능으로 증상을 완화시키는 것이 중요한 공간이다.


상담에서의 첫마디는 보통 "제가 ㅇㅇ때문에 힘들어서요"였으니 병원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 하지만 나는 가장 효율적인 대화를 하고 싶었다. 짧은 시간 안에 내 증상을 이해시키고 정확한 진단을 받은 다음 약을 빨리 받는 것이 목표였다. 지금까지의 상담과정을 돌이켜봤을 때 힘들다는 말이 나오면 왜 힘든지, 어떻게 힘든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거쳐 진단 기준을 확인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 어렴풋이 예상되었다. 정말 개버릇 남 못 준다고, 배운 것을 써먹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당연히 "제가 ㅇㅇ때문에 힘들어서요."건 "우울해요."건 "잘 모르겠어요."건 어떤 말로 시작해도 상관은 없다. 어디가 어떻게 문제가 생겼는지 찾아내는 건 의사와 상담가의 몫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약의 효과를 받고 싶었다. 그날 바로 처방전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미래는 모르고 말이다. 아주 잠시 후의 미래를 알았다면 조금 덜 조급해하며 여유 있게 진료를 받았을 텐데 참 아쉬운 부분이다.


차례가 돌아오고 처음으로 마주한 선생님은 의사 가운을 입지 않고 의자에 걸쳐놓은 채 앉아있었다. 마주 앉은 분위기는 상담과 비슷하기도 했고 나와 눈을 맞추는 만큼 화면도 자주 들여다보는 선생님이 어색하기도 했다. 모든 게 익숙하면서 낯선 묘한 분위기 속에 나는 무슨 말을 첫마디로 골랐을까. 사실 고르지 못하고 허둥지둥 들어간 상황이라 나도 내가 무슨 말을 첫 번째로 선택할지 알 수 없었다.


- 무슨 일로 오셨을까요?


선생님의 목소리는 꽤 다정했고 영 잘못된 병원을 고르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 입이 함부로 떨어지지 않고 그제야 말을 고른다는 것에 조급함이 느껴졌다. 말을 고르는 만큼 진료는 길어지고 약은 더 늦게 받고. 이런저런 생각에 정말 냅다 지른 말이


- 자살사고와 자해 충동이 있어요. 제어가 되는 수준을 벗어난 것 같아요.


모르긴 몰라도 이렇게 대답하는 환자가 흔치 않을 것이란 건 너무 잘 알겠어서 순간 민망함이 스윽 밀려왔다. 너무 아는 척하는 단어 선택이었을까. 배운 거니까 아는 척은 아니고 그냥 아는 거긴 한데. 물론 선생님은 아무렇지 않게 차트에 무언가를 타닥타닥 작성하기에 바빴지만 괜스레 머쓱해져 눈을 데로록 굴리며 민망함을 달랬다. 상담 경험을 묻는 질문에서 심리학 전공생이었다는 것도 밝혀버리게 되었고 그러면서 왠지 모를 멋쩍음이 더욱 커졌지만 덕분인지 초진은 금방 끝났다.


나는 우울장애 진단기준을 알았고 선생님은 내가 전공생이라는 것을 알았다. 3년 전 병력이 있고 10개월 정도 지속되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식욕이 없고 몇 달 새 체중이 많이 줄었어요, 잠은 잘 자지만 악몽을 종종 꾸고 수면 질이 좋지는 않아요, 무기력하고 집중이 잘 되지 않아요. 줄줄줄 교과서를 읊듯 증상을 읊어내니 남들은 한 시간도 걸린다는 초진이 손에는 검사지 몇 개가 들린 채 15분 만에 끝났다.


심리학과생의 첫 병원 진료는 이렇게 얼렁뚱땅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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