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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란 Oct 15. 2019

무엇보다 단호한  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포기하지 않은 의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면.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 DAY 3>

* 본 글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Sink or Swim , 2018 제작  

프랑스 |  코미디 |  2019.07.18 개봉 |  15세이상관람가 |  122분

감독: 질 를르슈



무엇보다 단호한 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의지'를 다룬 영화들은 모두 '자존감 바닥인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다. 따라서 주저앉아있던 주인공이 어떻게 '다시 일어나는지'가 중요하다. 혹은 또 다른 실패를 맛보더라도 반드시 그의 마음속에 시작을 향한 강한 집념을 남겨둬야 한다. 관객이 느낄 카타르시스는 '예전의 나'가 영화 끝에선 '전혀 다른 나'가 되어 있어야만 활활 타오를 수 있으니까. 그래서 이런 영화서는 해피엔딩과 새드엔딩을 사이에 두고 뭘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는 일은 의미 없다.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은 무엇보다 단호해서 빠져들었다. 한참 긴 생각의 꼬리를 잘라내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던 필자에게 참 좋은 영화였다. 어떠한 의심 하나 일으키지 않고, 계획적이지만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이성과 감정을 모두 혼합해 나의 '의지'에 응원을 불어넣었다. 동그라미와 네모를 언급하며 세상의 긍정과 부정의 시작을 풀이한 순간부터 본 영화는 '간단한 방법으로 명료하게 말할 수 있는 단호한 한 방'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공감은 감정의 문제라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데 어렵지 않다. 하지만 설득은 이성의 문제라 어렵다.  

출처: 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스틸컷

"서로 안 맞는 동그라미와 네모의 얘기일 뿐."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고작 두 개의 도형으로 왜 사람들이 긍정의 동그라미가 아닌 부정의 네모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한다. 태어났을 때부터 동그라미 구멍에 네모 도형을 밀어 넣으며 사는 인간의 일생을 빗대는 데, 이상하게도 의문이 든다거나, 기분 나쁘지 않다. 오히려 무언가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내가 그런 인간들 중 하나란 자각이 유쾌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마음 상할 필요는 없으니까. 사춘기를 겪듯 살면서 한 번쯤은 자신의 가치관과 자존심이 흔들리는 시간을 맞이하지 않는가. 보통사람은 다 그렇다.


이야기의 시작, 베르트랑은 오늘도 악몽 덕에 눈을 뜬다. 사춘기 아들의 "살기 싫어요. 아버지도 짜증 나"란 말에, "여름 때문이야, 그리고 그럴 때야."라고 쿨하게 받아칠 줄 하는 그런 평범한 아버지로 보이지만, 사실 그는 아침부터 시리얼에 각종 약을 섞어 먹는 무능력한 아버지다. 2년째 백수에 심각한 우울증까지 앓고 있는 남자다.

그의 유일한 낙은 수영장 아래까지 잠수해 열심히 발길질을 하며 물에 떠 있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다. 고요하게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베르트랑의 현실은 변할 틈이 없이 암울하고 비참하다. 백수란 타이틀이 가장에게는 너무 가혹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비하하는 처제 부부가 날이면 날마다 집에 찾아온다. 처제 부부의 차에 운석이 떨어져 버렸으면 하는 소원은 그의 숨겨진 버킷리스트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 베르트랑의 눈 앞에 등장한 환호성을 지르며 물살을 가르는 일반인 수중발레팀. 그는 고민도 하지 않고 신청서를 갖고 수영장으로 간다.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의 이야기를 풍성하게 해 줄 인물들의 등장은 이때부터다.    

출처: 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스틸컷

수영장에서 일하고 있는 티에리는 외톨이다. 사람들에게 투명인간 취급을 받으며 사는 삶은 익숙해졌으나, 지독한 외로움을 견디는 것은 그에겐 다른 문제다. 공사장 노동자 로랑은 분노조절장애로 아내에게 이혼을 당하기 직전에 놓여있다. 말을 더듬는 아들만이 그의 예민한 감정선을 틀어막을 수 있는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일까.

마퀴스는 겉으론 멀쩡한 사업가지만, 사실 손대는 사업은 다 말아먹은 능력자다. 그를 두고 이혼한 아내는 "당신은 수영장만 문제 있는 게 아니야."라고 했으니 말 다했다. 아, 수십 장의 앨범을 낸 로커 시몽도 있다. 그는 히트곡을 단 한 곡도 갖고 있지 않지만, 자신의 천재성을 믿고 꿋꿋이 살아온 진정한 가수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딸은 아빠 시몽의 삶에 존경심을 갖고 있지 않다.
마지막 이들 모두를 데리고 수중발레를 가르치는 강사, 델핀. 그녀는 잘 나가는 수중발레 선수였다. 파트너, 아만다의 사고로 더 이상 선수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절망감에 술에 의지하기 시작했고, 간신히 일반인 수중발레팀과 사랑을 통해 극복했다 믿고 있다. 하지만 델핀에게는 나아진 현실은 없다. 그녀 역시 다른 이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과거의 아픔 속에 빠져있는 아픈 인물이다.
백수에 우울증 환자 베르트랑까지 그들은 게이라고 놀림받으면서도 함께 훈련을 하고, 사우나에서 땀을 빼며 고단했던 마음을 달래고, 델핀의 시낭송에 눈물을 훔치며, 하루를 더 살아가고자 하는 힘을 얻는다. 수중발레를 통해 그들은 '게이'란 비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로'를 받고 있었기에. 
그리고 마침내 일생일대의 기회가 오자, 단번에 말한다.

"아니, 메달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해요."

평생 동그라미와 네모를 구분하며 "동그라미는 자유롭고 따뜻하지만, 네모는 규칙으로 동그라미를 뭉갠다."라고 말했던 그들이 처음으로 용기를 내, 합심하여 뭐든 될 수 있는 거대한 도형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물론 결과물은 당연히 '금메달'이다!

출처: 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스틸컷

"꿈을 포기하지 않는 건 중요해."

아만다가 시작한 지옥훈련은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의 유일한 웃음코드다. 그녀의 우렁찬 목소리와 찰진 손 스냅이 아직도 일상의 무료함을 쫓아주고 있으니까. 물론 <세라비, 이것이 인생>만큼의 효과(배꼽이 빠질 정도)를 내진 못하지만, 후반부 금메달을 딴 후 붉은 노을을 향해 환호성을 지르는 그들의 모습에 눈물을 흘릴 만큼의 영향력은 갖추고 있다. 이는 루저들이 불굴의 의지로 해낸 값진 결과에 의문을 품을 관객은 없을 거란 추측으로 이어진다. <독수리 에디>가 가져온 뭉클한 도전정신의 희열을 느낀 분들이면 더더욱 필자의 말에 동의할 것이다.  


수영장에서 회포를 풀며 삶의 부정을 털어냈던 그들이 긍정을 위해 거칠게 호흡하며 땀을 흘려갈 때 영상은 자연스럽게 '네모 프레임'에서 '동그라미 프레임'으로 인물들을 담아낸다. 자신의 삶의 전부가 모두 네모의 야성에 먹혀가고 있다 믿었던 그들은 사실 동그라미의 따뜻함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단지 보지 못했을 뿐이다. 베르트랑에게 자신을 존경하는 아내가 있었듯이.


자연스럽게 그들이 훈련과정에서 만들어내는 동그라미와 네모가 섞인 묘한 형태는 묵직한 감동을 주고도 남는다.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은 '네모 틀에 동그라미 모형이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만든 영화가 아니다. 수많은 모형 중 대척점에 있는 네모와 동그라미를 골랐을 뿐이다. 우리 삶을 방해하는 모형은 제각각 다양한 형태를 갖고 있다. 예로 뾰족한 걸 싫어한다면, 당신의 트라우마는 삼각형일 수도 있단 얘기다.

결국 어둠과 고독을 몰고 오는 모형, 프레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맞서느냐가 우리의 다음 순간을 결정한다. 해낼 의지만 있다면, 계속 나아갈 수 있으니까. 꿈을 포기하지 않는 집념은 얼마든지 중요한 삶의 목적이 될 수 있다.

출처: 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스틸컷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은 자로 젠 듯 딱 떨어지는 영화다. 유쾌하면서도 뭉클하다.

무엇보다 '현실에서 도망쳐 수영장으로 도피처를 마련한 남자들이 날린 묵직한 한 방'이 너무나 단호해서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지극히 사적이지만, 충분히 감정적이며 다분히 우리 이야기와 다를 바 없었다. 중년 남성들에게 무슨 공감을 할 수 있겠냐 하겠지만, 그건 나이로 환산해 따질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한심하면서 동시에 안타깝다가도, 덩달아 자신까지 우울해질 수도 있지만, '포기하지 않는 의지'란 불씨를 각자의 마음에 품을 수 있으니 충분히 남는 장사가 될 것이다.   


사람들이 다 헤집어 놓은 수영장에서 스스로를 패배자라 여기는 중년 남성들이 열심히 손을 휘젓고 발을 구를 때, 나는 내 꿈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나 갖고 있으나, 그것을 제대로 꽃 피우기란 어려운 일이니까.


몸짱 선수들이 즐비한 수영장에서 똥배가 나온 아저씨들이 매끈한 다리로 만드는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는 찬스는 거의 없다.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을 벌써 4번 봤음에도, 포기하지 않는 의지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또 한 번 더 볼 생각이다. 시몽의 친구 차 창문에 새겨진 멋들어진 말에 이미 동의했으니까.


"삶은 시작되었으니 되돌아갈 순 없다." - 티어스 포 피어스


출처: 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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