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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란 Dec 11. 2019

아이가 육상트랙에서 무조건 뛰어야 하는 이유, <앵커>

영화 <앵커>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해 한주를 뛰게 하지 않았다.

앵커 Anchor , 2018 제작  

한국 |  드라마 |  2019.11.28 개봉 |  15세이상관람가 |  78분

감독: 최정민


아이가 육상트랙에서 무조건 뛰어야 하는 이유, <앵커>


출처: 영화 <앵커> 스틸컷

"아이야, 때론 모르는 게 약이야." 

나도 참 많이 들어본 말이다. 어른들은 응당 이런 부류의 말을 해야만 스스로 성숙하고도 올바른 어른인 기분이 드는 걸까. 이 세상을 아직 제대로 겪어보지 못한 아이에게 마치 귀중한 진리를 깨우치게 한다는 듯 자부심까지 느껴가며 말하는 그들의 행위. 성숙하지 못한 아이를 배려하기 위해, 보호하기 위해 그랬다는 좋은 말은 개뿔이다. 그건 좋은 변명거리도 안 되는, 그저 어른들의 무책임한 헛짓거리일 뿐이다. 나를, 아이를 무시했다는 점이 기분 나쁘다는 소리가 아니다. 그 진실에서 파생될 책임을, 그러니까 오롯이 내가 견뎌야만 하는 감정과 상황을 모두 송두리째 빼앗았기 때문이다. 결국 어떠한 방파제 없이 거센 파도를 맞이해야 하는 건 아이의 몫이다. 정말 그 헤아릴 수 없는 아픔이 그들이 말한 '약'이란 말인가? 세상에 그런 개소리가 어디 있는가.  


따라서 <앵커> 속 한주는 계속 뛸 수밖에 없다. 세상에 모르는 일이 천지인데, 어른들의 입 속엔 거미줄만 잔뜩 쳐져 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쓰러질 때까지 뛰고 뛰면서 직접 자신에게 벌어진 일의 진상을 파헤쳐야만 한다. <앵커>의 '어른'은 아이에게 넘어지는 방법은 홀라당 건너뛰고, 뛰기만을 종용하며 한주를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 간다. 코치 선생님도, 경찰 아저씨도, 목사 사기꾼도 죄다 어른답지 않은 이 시대의 어른들로 기능한다. 거짓말, 비밀, 의심으로 무장해 진실을 원하는 한주에게 되려 비극을 선물한다.

영화 <앵커>의 감상평에 가시 돋친 언어들이 즐비한 이유다, 모르는 게 약이란 헛소리에서 진화된 말들이 아이를 감싸고, 옥죄고 있음을 관객이, 아니 이 시대의 어른들이 모를 리 없으니까. 

출처: 영화 <앵커> 스틸컷

고등학교 육상부에서 한주는 유망주다. 할아버지와 장애를 가진 남동생(영준)과 함께 살면서 고된 하루를 보내지만, 그녀의 달리기 실력은 나날이 발전했다. 다만 요 근래 대회만 나가면 계주 부문에서 실력 발휘를 하지 못해 고민이다. 계주의 마지막 주자인 앵커 역할은 자신의 주종목도 아닐뿐더러 자신감도 없기 때문이다. 최근 중요한 시합에서 앞주자가 배턴을 놓치는 바람에 좋은 성적도 거두지 못해 고민이 이만저만 아닌데, 코치 선생님은 배턴을 놓친 선수가 아닌 자신만 책망한다.  


<앵커>는 시작부터 한주를 괴롭힌다. 그녀에게 놓인 시련은 코치 선생님의 호된 호통부터 시작되는데, 이후 벌어질 사건들이 모두 빠르게 한주를 덮친다. 할아버지가 약초를 캐다 절벽에서 떨어지고, 물심양면으로 자신 가족을 도와주었던 목사는 후원금을 들고 도망친다. 설상가상, 세상에 단 둘이 남은 상태에서 영준이는 바다를 보고 싶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지고 만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한주. 한주는 영준이를 찾기 위해 사기꾼 목사를 수소문하고, 경찰에 적극적으로 수사를 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애초에 도움의 손길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희망이 한주에게 찾아올까? 절대, 그럴 리 없다.


육상훈련 성적도 점차 떨어지고, 행방을 알 수 없는 사기꾼과 찾을 수 없는 영준이의 소식은 한주의 마음을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끌고 내려간다. 그러나 한주는 다시 일어나, 집요하게 영준이를 찾기 위해 모두를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온통 어둠뿐인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어서가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아이 말고는 누구도 해결해주지 않으니까. 한주는 피해자에만 머무를 수 없는 현실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출처: 영화 <앵커> 스틸컷

<앵커>의 이야기는 한주의 뜀박질에 의해서만 진행된다. 그녀가 한 트랙을 뛸 때마다 사기꾼과, 코치와 경찰과 육상 선수들의 암묵적인 비밀과 추한 거짓말, 어처구니없는 의심들이 폭로된다. 결국 영화의 시작과 끝을 매듭 지을 역할은 '앵커'를 부여받은 한주뿐이다. 동생을 찾겠다는 누나의 강한 의지가 <앵커>의 전체적 분위기를 답답함과 안타까움으로 만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이의 질주에 희열감을 느낄 수 없는 것도 당연한 얘기다. 처음부터 한주에게 앵커는 버거웠던 자리였고, 그녀는 시간이 다 해결해줄 거란 말에 용기와 위로를 얻을 인물도 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앵커>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해 한주를 육상트랙에서 뛰게 하지 않았다.  

자신을 간절하게 기다릴 동생에게 "누나가 꼭 찾아갈게!"라고만 소리칠 수 있는 이 비극적인 현실. 이러한 사건들이 터질 때마다 '피해자인 개인'만을 난도질하는 이 사회. <앵커>가 그린 세상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저 한주가 주저앉고, 다시 뛰어다닌 그 세상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어서 개탄스러울 뿐이다.

물론 한주를 제외한 다른 배우들의 어색한 연기가 이야기의 집중도와 흐름을 깬 점은 <앵커>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그 점이 작품의 흠이 되진 않을 것 같다. <앵커>는 한 개인(국민)의 비극적인 사건을 대하는 사회의 폭력적인 시선과 무능력한 대처를 있는 그대로 재현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작품이다. 











PS.  이 글은 페이스북 '전주 디지털 독립영화관'에도 게시된 글입니다. 전주 독립영화관 관객동아리 '씨네몽'회원으로 개봉작(무료)을 본 후 리뷰를 올리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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