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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란 Jan 14. 2020

모르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더 차일드>

앞으로 더 좋아질 그들의 관계, 다르덴 형제 감독이 처음부터 보여준 희망

더 차일드 The Child, 2005 제작  

벨기에 외 |  드라마 외 |  2006.01.26 개봉 |  12세 이상 관람가 |  95분

감독: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모르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더 차일드>



<더 차일드>는 거대한 담론이나 이데올로기를 담은 영화가 아니다. 이야기가 베베 꼬이지도 않았고, 거창한 주제의식을 위해 편집기술을 어렵게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해하기 쉽고, 추리하기 쉽고, 또 감정적으로 동요하기도 어렵지 않은 작품이다. 그런데 여운 참 길게 남는다.


브뤼노는 거리가 주 생활무대다. 부랑자와 다를 바 없이, 비행청소년으로 시작해 지금까지 오롯이 오늘만을 위해 소매치기를 하며 살고 있다. 친구의 오토바이를 타고 사람들의 핸드백을 훔치고, 훔친 물건을 팔고, 그 돈으로 하루를 산다. 영화에서는 그의 직업이나 나이 등과 같은 기본적인 인적사항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관객은 너무나도 쉽게 브뤼노의 현재를 통해 그의 과거와 미래를 짐작한다. 그의 현재 '소매치기'에서 단 1센티미터도 벗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영화 <더 차일드> 스틸컷

그런 그에게 빠진 소니아. 그녀는 브뤼노와 연인 관계다.
역시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먼저 영화가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 정보는 스토리를 전개하는 부분에서 문제 되지 않기 때문이고, 동시에 시간을 할애해 대놓고 보여줄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린 서로에게 장난치느라 정신이 없는 젊은 청춘들의 모습을 통해 그들이 상대에게 얼마나 흠뻑 빠져있는지를 알 수 있다. 나아가 아이를 안고 브뤼노를 찾아다니는 소니아를 보면서 그들이 소위 말하는 안정적인 가정이 아니라는 것까지도 짐작할 수 있다.
 
<더 차일드>는 젊은 거리의 연인을 주인공으로 삼고, 그들이 사는 삶을 노골적으로 담고 있다. 노골적인 요소는 브뤼노가 자신의 아이(지미)를 돈을 받고 팔아넘긴 것으로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돈만 벌 수 있다면 못할 일이 없는 아빠가 저지른 순간적인 판단은 경악스러운 행동으로 이어지고 관객은 그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전개된다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우린 겨우 영화의 시작점에 서 있었을 뿐이다.
본격적으로 보게 될 브뤼노의 생존기술을 다 보지도 못한 상태란 얘기다. 

출처: 영화 <더 차일드> 스틸컷

지미를 팔아 돈을 벌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란 안일한 생각은 브뤼노가 가진 현재의 생존 방식이다. 그에게는 돈이 가장 중요한 가치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연인이 자신의 곁에 계속 있을 거란 확신은 그에게 성장하고 성찰할 기회를 주지 않고 있었다. 브뤼노는 가장 멍청하고 불완전한 자아에게서 벗어날 기미가 전혀 없는, 그야말로 배움의 의지가 없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아이일 뿐이다.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철없이 당장 옷을 살 수 있는 돈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애인이 있다는 것만으로 그는 행복한 인간이라 믿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지미의 엄마 소니아는 다르다. 지미를 품에 안은 소니아에게서 엄마의 사랑이 느껴지는 게 참 다행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슬플 뿐이지만 말이다. 부성애는 볼 수 없었지만 모성애는 확실하게 보였고, 그것은 곧 <더 차일드>가 말하는 한줄기 희망을 의미하고 있었다.   


브뤼노는 아기를 팔아넘기면 안 된다는 것을 몰랐다. 아기가 없어진 후 충격에 쓰러진 소니아에게 "아기는 또 낳으면 된다."는 말을 할 정도로 아무런 도덕적, 윤리적 의식도 없다. 그런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기에 그는 자신을 고소한 소니아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고, 아무렇지 않게 경찰에게 그녀를 험담한다. 새아빠와 결혼한 엄마를 찾아가 자신의 알리바이를 부탁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이제 그는 언제 벼랑으로 고꾸라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소니아의 용서도 받을 수 없고, 지미를 다시 되찾은 대가로 얻은 빚을 구할 방법도, 그렇다고 그 모든 상황에서 도망칠 수도 없다.
어리석은 선택을 한 그는 위험한 칼날 위에서 안전하게 내려오기 위해, 다시 계속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를 도와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으니까.


출처: 영화 <더 차일드> 스틸컷

<더 차일드>에서 소니아가 쏘아 올린 희망은 브뤼노의 미숙한 사랑으로 연결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돈보다 소니아를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매몰찬 연인을 찾아가 배고픔을 호소하며 돈을 달라는 그가 웃플 뿐이지만, 관객은 자신도 모르게 브뤼노가 하루빨리 달라지길 바란다. 소니아에게서 본 사랑이 브뤼노에게서 본 사랑과 너무나 달랐을 뿐 틀린 건 아니었으니까. 그녀가 그보다 더 성숙했고, 먼저 부모가 됐던 것이다. 자식을 버린 파렴치한 아버지가 아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로 보인 이유는 오직 소니아를 향한 그 어리숙한 사랑 때문이다.   


브뤼노는 다시 소니아의 품으로 돌아간다. 물론 처절하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후에.
돈을 마련하기 위해 또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소매치기를 했지만, 경찰에게 잡힌 건 함께한 친구뿐이었다. 그는 홀로 잡힌 친구를 위해, 직접 경찰서로 가 자신의 범행을 자백한다. 친구의 잘못이 아님을 시인하며 그동안 해왔던 짓에 대한 대가를 받는다. 자백은 현실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갚아야 할 돈도 더는 구할 방법이 없었고, 인간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의식주도 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감옥에 갇힌 자신을 만나러 온 소니아의 손을 붙잡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오열하는 브뤼노.
<더 차일드>는 두 연인이 서로의 얼굴을 맞잡고 흐느끼는 장면으로 끝난다. 브뤼노가 '뭐가 중요하고 귀중한지를 아는 인간'으로, '아이를 바라볼 수 있는 부모'로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는 순간이다. 그가 지금까지 외면하고 몰랐던 것을 스스로 깨우쳐 알게 되자, 우린 비로소 새롭게 탄생할 한 가족의 모습을 보게 된다.    
앞으로 더 좋아질 그들의 관계, 다르덴 형제 감독이 처음부터 보여준 희망 말이다.

출처: 영화 <더 차일드> 스틸컷

<더 차일드>는 제58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유명한 작품이다. 장 피에르 다르덴과 뤽 다르덴 형제 감독은 이 작품 외에도 다른 작품으로도 상을 많이 받았다. 그 덕에 '칸 영화제가 사랑하는 감독'이란 별명까지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이 만든 작품엔 모두 결핍을 가진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로제타>(1999), <아들>(2002), <더 차일드>(2005), <내일을 위한 시간>(2014), <언노운 걸>(2016) 등 그들이 집중한 인물들은 환경이 아닌 인간이다. '사회적, 정치적 환경으로 고통받는 인물들'이 아닌, '그러한 환경에서 버티며 살아가는 나약하고 어리숙한 인물들'이 주인공이다. 몸부림치고, 깨지고 부서지면서 삶을 살아가는 그들에게 깃든 따뜻함과 행복은 형제 감독이 관객에게 주는 선물이다.

켄 로치 감독이 <미안해요 리키>와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통해 사회를 고발하고 책망한다면, 다르덴 형제 감독은 사회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우리'를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춘다. 누군가를 탓하는 것이 아닌 그저 관망함으로써 한 인간을 조용히 관찰하는 것이다. 브뤼노와 소니아의 삶을 몰래 엿본 것 같은 느낌도 바로 이 때문이다. 거칠게 흔들리는 카메라가 오직 인물들의 표정과 행동에만 집중한 까닭도 마찬가지다.

<더 차일드>에는 바라만 봐도 가슴을 저리게 하는 힘이 있다. 묵묵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지만, 분명 영화가 끝난 후엔 전과 다른 시각을 갖게 하는 마력도 분명히 느꼈다. 브뤼노와 소니아가 서로를 눈물로 안을 때 보인 작은 변화(희망)가 단번에 영화의 해피엔딩을 이끌어 냈다는 게 사실 가장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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