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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어른이 되는 건 불가능해,
<어른도감>

우린 어떤 방식으로 어떤 어른이 되어 가고 있는가?

by 우란

* 본 리뷰는 영화의 반전과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른도감 Adulthood(2017)

한국 | 코미디 외 | 2018.08.23 개봉 | 12세이상관람가 | 92분

감독: 김인선


혼자 어른이 되는 건 불가능해, <어른도감>



<어른도감>은 입만 열면 거짓말인 삼촌과 그런 삼촌을 똑 부러지게 휘어잡는 조카의 케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능글맞은 재민의 눈빛과 그를 단번에 땡그란 눈망울로 제압하는 경언의 눈빛이 코미디와 드라마적 요소를 동시에 충족시킨다. 가족인 듯 아닌듯한 두 사람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가 무거운 긴장감으로만 팽팽하게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도 여러 호평 중 한 가지일 듯싶다.
그렇다고 '막연하게 재미있는 작품이다',라곤 말하기 힘들다.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 놓인 건, 조카 경언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님을 영화를 본 관객은 모두 알 것이다.

d01cec952b7b86db3ef567ad14caf080fb3d2514.jpg 출처: 영화<어른도감>스틸컷

경언은 열네 살에 아빠를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냈다. 세상에 정말 홀로 남겨졌다고 생각한 순간, 얼굴도 모르는 삼촌 재민이 찾아온다. 연신 혼자 텅 빈 집에서 살 조카를 걱정하며, 짐을 싸들고 형의 집에 온 재민. 하지만 경언은 어벙벙하게만 보이는 삼촌이 어색하기만 하다. 하는 말은 전부 자신을 배려하고 걱정하는 거 같은데, 행동은 전혀 딴판이다. 그러니까 어째 말만 잘하는 사기꾼 같다. 어디까지 진심이 담겨 있는지도 몰라 혼란스럽기만 해, 우선 아기였던 자신을 품에 안고 웃고 있는 재민을 사진으로 확인했으니 그의 신원만큼은 확실하다고 믿는다. 다만, 삼촌이 아닌 아저씨다. 가족이라 결론짓기엔 그들은 서로 몰라도 너무도 모르니까.


재민에겐 다른 속내가 있다. 별명은 하는 일마다 다 말아먹는다고 해서 국밥인데, 직업은 또 거짓 연애로 먹고사는 제비다. 온통 거짓말 투성인 그에게도 숭고하고도 진실한 꿈이 있는데, 바로 일식집 셰프다. 현재 그에게 가장 필요한 건 돈. 일식집을 개업할 수 있을 만한 자금 마련이 시급하다. 그런 와중에 연락을 끊은 형이 죽었다.

아니나 다를까, 재민은 경언에게 대뜸 아빠의 보험금에 대해 묻는다. 똑 부러진 경언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님에도, 그는 포기하는 법이 없다.(능구렁이 같은 엄태구 배우의 연기력이 일품이다.) 결국 경언의 법적 후견인이 된 후 형의 사망보험금을 날치기한다. 그에게도 피치 못할 사연이 있었으나, 의심에 의심을 하며 경계를 쉽사리 풀지 못한 경언에겐 '그럴 줄 알았어!'로 정의 내려지게 된다. 경언은 재빠르게 연락이 닿지 않는 재민을 찾아 나선다. 그의 실없는 농담과 진심이 담긴 말들을 가볍게 흘려듣지 않은 열네 살의 추리는 역시나 단번에 삼촌을 찾아낸다.

96df55f32ae30f105b135ad8e67614e1f4c37f04.jpg 출처: 영화<어른도감>스틸컷

보험금은 이미 사라진 상태. 재민은 사기꾼임에도 불구하고 명불허전 '국밥'이었다. 조카가 보는 앞에서 보험금을 죄다 뺏기고 만다. 얼마나 한심한 삼촌인가. 그런데 이 삼촌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조카에게서 빛나는 재치를 발견했다며 함께 일을 하자고 한다. 동네 약사(점희)에게 접근해 돈을 갈취하는 일에 경언은 울며 겨자 먹기로 참여한다. 경언은 졸지에 삼촌의 딸로 점희를 만난다. 마침 점희는 교통사고를 남편과 딸을 잃은 상처를 가진 인물이었고, 경언은 단번에 그녀의 마음에 조심스럽게 자리 잡는 데 성공한다.


완벽하게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고 믿는 재민. 하지만 경언은 마음이 갈수록 불편해진다. 점희는 그런 일을 당해야 될 사람이 아니다. 아무리 곱씹어봐도 '나'의 목적(돈)을 위해 죄 없고 가여운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다. 경언은 재민에 대한 믿음이 확고히 자리잡기 시작한 점희에게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고백한다.


"아무도 믿지 마세요."

bc71422aa13713e490bb267ef050783b2d092b39.jpg 출처: 영화<어른도감>스틸컷

역시나 점희는 잔잔하기만 했던 마음에 돌을 던진 재민의 정체를 파악한다. 재민은 자신을 벌레로 보는 점희의 눈빛에 집으로 돌아가 계획을 망친 경언에게 악담을 퍼붓는다. 자신이 벌레만도 못한 인간임을 부정하면서. 감정을 이용해 사람을 홀리고 조종하는 것만큼 하찮고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을까. 어린 경언은 이미 깨달았음에도 재민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가장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제일 좋은 방책이라 스스로 끊임없이 정당화하며 살던 날들을 어린 조카가 단숨에 강펀치를 날려 공중 부양시킨 것이다.
"삼촌이 틀렸고, 잘못했어요!"라고.


<어른도감>의 영어 제목은 'Adulthood'다. 번역하면, '아이가 다 자라 성인이 된 시기'를 말한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성인'이다. 그렇다면 점희에게 치밀한 계획을 세워 접근한 재민이 성인이 아니란 걸까? 아니다. 재민이 여전히 성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재민은 책임을 제대로 진 적이 없는 어른이다.
너무나 인간적이고 어설픈 어른. 애초에 그가 별명이 국밥인 이유는 세워놓은 계획을 번번이 감정으로 파투 냈기 때문이다. 시작은 오롯이 자기 자신을 위해 해 놓고는 끝에 가면 흐지부지 행동해 망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된 끝맺음을 해본 적이 없었다. 수없는 경험을 통해 습득한 건 재빠른 도망 기술뿐이다.
사실상 재민에게 책임이란 단어를 꺼내기도 민망하다. 어떤 결과를 도출했든 그 점에 대해 완전한 마침표를 찍고 새롭게 시작한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재민은 아는 것이 많지만, 정작 중요한 건 모르는 사람으로 크는 중이었다. 경언에게 '시간'에 대한 명언을 참 멋있게 하는 것부터가 빼박 증거다. 춤을 사랑했던 소년이 아이돌 꿈을 위해 형의 돈을 몰래 가져다 쓰고 난 후, 형과 아예 연을 끊어버린 일이 도화선이 되었겠지.
결과적으로 집을 나간 이후부터 재민의 삶은 참 위태롭고 어설프게 흘러갔다.

51ad96cbbf553972c590eef60b2a6d1ad068d3b8.jpg 출처: 영화<어른도감>스틸컷

재민은 또다시 도망친다. 경언을 혼자 두로 열심히 횟집에서 주차요원으로 다시 삶을 시작한다. 그런데 예전과 같은 마음은 아니다. 더 절망스럽고, 비참하다. 왜일까. 이제 더 이상 혼자 망하고, 혼자 감당했던 후폭풍이 아니니까. 경언과의 만남이 자신을 조금 변화시켰음을 깨닫는 것도 중요한 그의 몫이다. 이에 재민은 '얼른 조카에게 보험금을 돌려줘야지!'란 목표를 품 속에 갖는다.
자기 삶 하나 제대로 살지 못하는 어른이지만, 그는 조카를 사랑하는 삼촌이니까.

경언 역시 마찬가지다. 경언은 바보 삼촌을 단번에 찾아낸다. 법원에 법적 후견인으로 등장하지 않으면 그는 감옥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 원수 같은 삼촌에게 경언은 다시 또 손을 내민다. 세상에 혼자였던 자신에게 나타난 삼촌이 바보 같지만, 그에게서 아빠와 같은 사랑을 느꼈던 경언이었다. 이로서 재민은 애매모호한 나쁜 사람이 아닌 더 따뜻하고 좋은 사람으로 성장할 기회를 얻게 된다. 물론 이런 확신은 <어른도감>이 경언과 재민의 관계를 틈틈이 조카와 삼촌으로, 가족의 사랑으로 쌓았기 때문에 가능한 결론이다.
<어른도감>의 마지막 장면을 유심히 보면, 참 좋은 결말을 가진 작품임을 알게 된다. 재민은 자신을 찾아온 경언에게 어린 시절 자신을 두고 떠난 엄마를 만나게 해 주겠다고 말한다. 곧 기름이 떨어질 차를 몰고 굽이 진 도로를 달려 경언의 엄마 집 앞에 차를 세운다. 아빠와 살면서 내내 경언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엄마의 존재. 경언은 츤데레 삼촌의 응원에 용기를 낸다. 그런데 이 삼촌은 끝까지 짓궂다. 경언을 두고 홀로 차를 몰고 내려가버린다. 이미 초인종을 누른 경언은 당황하지만, 엄마의 목소리에 얼어붙는다.

이 장면은 다양한 의문을 남긴다. '정말 친엄마의 집일까?'부터 '경언이 엄마와 함께 살까?', '삼촌은 그동안 경언의 엄마와 왕래가 있었나?' 등 다양한 질문이 끝없이 관객의 머릿속을 채운다. 하지만 우린 엄마와 마주한 경언을 볼 수 없다. 멈춰버린 차를 세우고 경언을 기다리는 재민과 그에게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며 홀로 도로를 걸어온 경언을 볼뿐이다.

179d17269a65cfaaf4203a5c2d00f202462edc03.jpg 출처: 영화<어른도감>스틸컷

경언이 엄마와 어떤 결론을 짓고 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어딘가 후련해 보이는 경언의 표정에서 어렴풋이나마 그녀의 삶이 어둡고 외롭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든다. 철없어 보이는 삼촌의 장난스런 말에서도 똑같은 안정감이 느껴진다. 웃으며 함께 도로를 걸어가는 두 사람에게서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을 거란 웃픈 예측도 '그냥 기우일 뿐이야'라고 생각되기까지 한다.

<어른도감>은 우린 어떤 방식으로 어떤 어른이 되어 가고 있는 지를 묻는다. 정답이 없는 열린 결말 같지만, 확실힌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재민도 경언도 그리고 우리도 어른을 향해 열심히 달리고 있다는 점. 남보다 못한 사이인 조카와 삼촌의 관계를 통해 웃프게 보여주며, 무엇보다 '서로를 향한 진심'은 결코 숨길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린 혼자의 힘으로 어른이 될 수 없다. 예측하지 못하는 일들이 혼자의 힘으로 절대 일어날 수 없는 것처럼.
우린 누군가와 꾸준히 상호작용하며 옳고 그름을 배우고,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며, 다음에 행할 자신의 행동과 선택을 신중히 결정한다. 그렇게 깨지고 일어서면서 책임감을 짊어질 줄도 알게 되는 게 아닐까. 사실 난 '좋은 어른이 무엇이다', '진정한 성인은 어떤 이를 말한다'에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다.
그러나 그 답이 가장 이상적인 답변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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