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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라질 것들에게, <천 명 중의 단 한 사람>

전주국제영화제 국제경쟁 작품상 수상, 사회가 인간에게 미치는 것들.

by 우란

*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온라인상영작)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천 명 중의 단 한 사람 One in a Thousand (2020)

아르헨티나 | 드라마 | 120분

감독: 클라리사 나바스



우라질 것들에게, <천 명 중의 단 한 사람>


이리스가 더러운 거리에서 농구공을 튀긴다. 무심한 듯 툭툭, 그러나 공을 놓치는 법이 없다. 수없이 반복된 행동이 낳은, 그래서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그녀의 모습. 이리스가 걷는 거리는 작은 마을이다. 다만 마을은 병들지 않을 곳이 없을 정도로 피폐함을 품고 있다. 곳곳에 구멍 난 시멘트 바닥을 시작으로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거리, 총알들이 선명하게 밝혀있는 낡은 아파트 외벽, 술과 약물에 중독되어 어디든 앉아 축 늘어진 아이들, 그런 그들을 무기력하게 대하는 어른들의 모습까지 이 마을의 첫인상은 '나라의 무관심과 빈곤으로 인해 모든 것이 폐허가 된 삶의 공간'이었다. 농구공을 품고 걷는 이리스가 이질적이지만, 깊은 인상을 남기는 이유다.

그녀는 농구공에 묻은 침과 각종 더러운 것들을 떼어내기 위해 시멘트 벽에 박박 공을 문지른다. 이 마을 사람들은 몰라도 자기만큼은 더럽고, 음흉한 것들에 먹히지 않겠다는 의지의 행동이랄까. 그녀의 모습에서 우린 <천 명 중의 단 한 사람>에서 결코 아름답고 광활한 자연은 볼 수 없음을 깨닫는다. 아니 첫장면을 본 순간부터 아름다움을 찾을 생각이 먼지처럼 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앞으로 시작될 이리스의 첫사랑 이야기엔 분명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다 부서진 건물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며 열심히 농구공을 만지작거리던 이리스의 눈이 반짝거린 그 순간을 봤다면,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거다. 농구공을 빌미로 찾고 있던 첫사랑의 등장. 팔자걸음으로 세상 힙하게 걸어가는 레니타가 이리스의 시선에 들어온 그때, 우린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천 명 중의 단 한 사람>은 로맨스 영화다. 이리스에게 '천 명 중의 단 한 사람'이었던 레니타가 등장했을 때부터 시작된 사랑 이야기. 하지만, 제목에서도 느껴지는 운명적 사랑은 마을의 난잡한 분위기와 섞이는 탓에 비극의 냄새를 풍기고 만다. 결국 한참 찾아 헤맸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을 거란 예감은 현실이 된다. 그들은 사랑만으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현실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영화 <천 명 중의 단 한 사람> 스틸컷

<천 명 중의 단 한 사람>의 배경은 파괴와 빈곤이 일상인 마을이다. 나라에서도 포기한 빈민촌에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보는 내내 거북하고, 초조한 까닭은 어떠한 윤리적, 도의적, 사회적 규범이 버려진 휴지조각으로 기능하기에 그렇다.

마을 일상에 드러난 폭력은 당연한 일과로 비치고, 지나간다. 거리에서 성추행과 성폭력을 당해도, 마약을 해도, 경찰이 쏜 총에 맞아도 그 누구도 소리치며 나서지 않는다. 그런 일을 당하고 접하는 것에 일반화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리스 매일 부족한 돈 때문에 언성을 높이는 부모와 살고, 그녀의 소울메이트 쌍둥이 형제(알레, 다리오)는 집에 들어오지 않는 아빠의 폭력 아래 엄마와 함께 산다. 마을 아이들은 전부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지만, 그들에게 올바른 성 인식이나, 바른 생각을 가르치고 도울 어른은 없다. 청년들은 자신들의 삶을 갉아먹게 된 이유가 무관심한 사회로 인한 미숙한 자아란 사실을 알지 못한다. 어른들은 '포기'와 '외면'을 혹부리 영감님처럼 달고 살면서 현실을 비난한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이 맹렬한 자유를 얻은 탓에 개인의 욕구를 채우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으며, 나아가 그들만의 규범과 규칙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확인되지 않은 진실, 즉 소문'으로 거대하고 울창한 숲을 조성했다. 이리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더러운 이야기들'이 소문이 아닌 '진실'로 유통되고 숲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녀가 사회의 부조리와 사람들의 편협한 시선에 대항하는 적극적인 인물은 아니다. 이리스 역시 침묵하는 데 더 익숙한 마을 사람 중 한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이리스는 그들과 다른 인간으로 소개된다.


마을 사람들에게 '우리와는 다른 사람'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농구 소녀. 낮이나, 밤이나 무리로 몰려다니면서 술과 약물에 몸을 맡기는 또래 친구들과는 다른 그녀. 따라서 친구들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이리스에게 추근대는 남학생도 그녀가 싫다고 말하는 순간, 미안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니까. 꿈과 희망이란 웃기지도 않는 단어에 가슴이 설레고, 행복감을 느끼지 않는 건 그들에게 당연하지만, 이리스에겐 아니다. 그녀는 자기의 삶을, 나라도 포기해버린 자신의 고향과 같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내면이 누구보다 견고한 이리스는 당연히 그들과 달랐다. 침묵으로 문제를 당장 만들지 않는 것 뿐이다. 그러니 문란한 성생활이 당연한 놀이와 휴식으로 자리 잡은 마을에서 '건전한 이리스'가 유일하게 농구공을 튀겨도 아무런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출처: 영화 <천 명 중의 단 한 사람> 스틸컷 (레니타와 이리스)

묵묵하게 농구에만 직진하던 그녀의 일상에 난데없이 첫사랑, 유성이 떨어진다.

첫사랑이었던 레니타가 다시 마을(고향)에 돌아온 것이다. 이리스는 레니타를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무섭게 그녀에게 빠져들고 만다. 그녀가 왜 여길 왔으며, 어떤 일이 있었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할 것인지, 물어보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닌 이리스. 하지만 이리스는 레니타의 뒤를 몰래 졸졸 따라다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유일한 단짝 친구들, 쌍둥이 형제에게 레니타의 얘기를 꺼내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레니타는 이미 마을 사람들에게 '에이즈 보균자'로 낙인찍힌 여자였다. 이리스의 레즈비언 친구는 레니타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면서, 강하게 주장한다. 마약 때문에 몸을 파는 아주 질 나쁜 친구라 말이다. 순식간에 마을엔 레니타의 소식이 컴퓨터의 전산망보다 빠르게 전해진다. 짝다리를 하고, 담배를 피는 레니타에게서 느껴지는 아우라는 이미 지독한 냄새를 동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리스는 열심히 레니타를 찾는다. 소문을 믿어서도, 믿지 않아서도 아니다. 본능이다. 레니타와 함께 하고 싶은 욕구.

이리스는 레니타를 뒤로 하고 탄 버스에서 그녀와 맞닥트린다. 그렇게 소극적으로 숨어서 지켜보았던 그녀를 눈 앞에서 본 것이다. 레니타는 이리스가 자신을 따라다녔음을 알고 있었다. 학창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며 레니타에게 자신을 소개한 이리스는 미친 듯이 뛰는 가슴을 붙잡고 전화번호를 교환한다. 먼저 내린 레니타를 쫓아가 자신의 마음이 담긴 편지까지 주는 데 성공하고, 그토록 원했던 첫사랑과 만나기 시작한다. 국민연금을 믿지 않는다고 싸우는 부모님의 소리는 그녀에겐 그저 배경 소음일 뿐이다. 그녀의 세상은 온통 레니타로 물들었으니까.

40살 레즈비언과 파라과이에서 살다가 온 레니타는 고향에서 돈을 벌면 스페인으로 떠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제 이리스의 문제는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된 레니타의 마음과 그녀를 둘러싼 수많은 소문의 실체를 믿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무엇하나 입 밖으로 내지 못한다. 자기보다 더 적극적인 레니타에게 만족한다. 자신이 에이즈 보균자와 만나고 있다는 소문이 마을 전체에 펴졌을 때도 그녀는 어떠한 행위도 보이지 않는다. 작은 마을 안에서 아무리 숨고 또 숨어도 이리스가 레니타와 만나는 건 모를 수 없는 사실이었다.

출처: 영화 <천 명 중의 단 한 사람> 스틸컷

클럽에서 봉춤 댄서로 활동하며 손님들과 짙은 스킨십을 하는 레니타를 보고 이리스는 서운함을 느낀다. 직업이라 생각하고 쿨하게 넘어가도 될 일이 그녀를 잠식했던 레니타에 관한 소문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이리스는 레니타에게 담아 놓고 만 있던 질문을 털어놓는다.

"다 너에 대해 말해."

"그럴 리가! 날 아는 이가 없는데!"

기침을 멈추지 못하면서도 담배를 물고 늘어지고, 정체 모를 약을 불법으로 거래하고, 클럽에서 춤추는 댄서로 일하는데 그것만 하는 것 같지도 않고, 레즈비언 친구들과 음란한 대화로 즐거움을 느끼는 레니타의 삶은 이리스가 들었던 소문과 딱 들어맞았었다. 이리스 스스로 아닐 거라 믿었으나, 실상은 가슴 깊은 곳에 숨겨놓고 있었던 의심이 수면 위로 올라온 순간이었다.

그러나 레니타는 이리스와 달랐다. 수줍고 소극적인 그녀는 물론이고, 소문에 소문을 탄생시키며 생을 지속하는 마을 사람들과도 달랐다. 레니타는 어디서든 당당했고, 저돌적이었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결핍을 마주 볼 줄 알았다. 그녀는 당당하게 말한다.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이는 단 사람도 없음'을. 그리하여 떠도는 말들에 관심 없었던 척만 했던 이리스는 점점 변화한다. 매일 같이 마을 사람들을 피해 다니며 레니타와 애정을 확인했던 그녀가 달라진 것이다. 그들은 모든 사람의 눈을 피하기 위해 외딴곳을 찾아다니며 몰래 사랑을 나눴었다. 농구밖에 몰랐던 이리스가, 갖고 있던 모든 말도 안 되는 것(법)들을 레니타가 깨부수면서 <천 명 중의 단 한 사람>이 그리고자 했던 진정한 사랑은 시작되었다.

침묵에 익숙했던 이리스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내보이고, 쌍둥이 형제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자리하게 된다. 나아가 삶의 공허함과 싸우던 레니타를 진심으로 위로해주며 그녀와 깊은 유대감까지 형성한다. 침과 쓰레기가 넘쳐났던 마을은 그들로 인해 점차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한다. 횡량한 도로도, 구멍 난 바닥도, 다 찢어진 커튼도, 여전히 들려오는 총소리와 신음소리도, 레니타와 이리스가 등장하면 자연스럽게 허공에 흩어질 뿐이다.

출처: 영화 <천 명 중의 단 한 사람> 포스터

그러나 결말은 미치게 슬프다.

옥상 위에 올라가 사랑을 속삭이던 두 사람에게 드리운 검은 그림자. 마약을 하고 있다고 믿는 레니타에게 접근한 남자들에 의해 이리스와 레니타의 세계는 산산이 조각난다. 레니타를 향해 어두운 속내를 드러내며 폭력을 행사하는 그들. 그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두 여자는 부단히 애를 쓰지만, 결국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리스가 유리로 남자의 머리를 내리치면서, 사건은 급속도로 빨리 진행된다. 레니타와 이리스의 관계를 그리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영화가 미친 듯이 속도를 내는 순간, 우린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만 듣게 된다. 도망치라는 레니타의 목소리에 쌍둥이 형제의 집으로 도망쳤던 이리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 인지한다. 언제 누가 어떻게 죽어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무법지대. 경찰은 그들을 지켜주는 게 아니라, 처벌하기 위해 존재했다.


이리스는 늦게나마 쌍둥이 형제와 레니타를 찾아 나서지만, 끝내 실패한다.

어디에도 는 레니타.

자신 대신에 자수를 한 것인지, 그 남자들을 피해 도망친 건지, 그것도 아님 여전히 친구의 집에 숨어있는 건지, 경찰의 총에 맞아 죽은 건지, 이리스는 알 수 없다. 그저 마을 한가운데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사라진 레니타를 기다려야 한다. 절망스러워 절규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달라질 것이 없는 세계니까.


쉴 새 없이 눈물을 닦아내는 이리스의 모습이 <천 명 중의 단 한 사람>의 마지막 장면이다.

레니타와 이리스의 사랑을 비극으로 몰고 간 원흉은 무엇인가.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일까. 애초에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게 한 무능하고도 폭력적인 나라의 탓일까. 관객은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소문은 물론이고 정부의 실체를 확인할 수도 없다. 그저 무기력하게 지켜봐야만 한다.
진실로 알 수 있는 사실은 단 4가지뿐이다. 진심으로 레니타와 이리스가 사랑했다는 사실, 레니타의 건강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 실체 없는 소문에 실제로 흔들리는 이들이 많았단 사실,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또 그렇게 살아갈 거란 사실.


<천 명 중의 단 한 사람>이 주는 절망은 바로 그것이다. 이리스는 그 마을을 떠나지 않는 이상, 똑같은 침묵에 잠겨 살 것이다. 레니타를 영영 못 만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랑을 위해 용기를 냈던 그 마음도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다시 빨려 들어갈 것이다. '에이즈 보균자와 사귀었던 이리스'가 다시 '건전한 이리스'로 되돌아가겠지.

이 작품은 인간에게 환경이 나아가 사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한다. 우린 가장 연약하고 다치기 쉬운 소녀, 이리스의 첫사랑을 통해 인간이 가진 추악한 이면과 내재된 혐오를 봐야했다. 무척이나 불쾌했으나, 그 감정이 작품 속 인물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닌 나에게서 나왔던 사실을 모르지 않았기에 한편으론 섬뜩했다. 개인과 개인이 모여 단체가 되고 나라가 되지 않나?

무엇이 중요하고, 어떤 것이 삶의 가치가 되는지 모르는 곳에서, 생존을 향한 강한 욕구만 뿜어내는 사람들. 그래서 할 줄 아는 것이 오직 누군가를 향한 날 선 편견을 생성하는 것뿐인 사람들. 그들로 인해 무참히 희생되어버린 레니타와 이리스. 우린, 나는 어느 편에 서있는 사람일까.

진한 찝찝함과 애석한 마음을 남긴 작품이었다.


레니타가 피를 토하며 말했던 그 말,

그 말이 이 영화가 내게 준 유일한 통쾌함이었다.

"세상의 편견에 지쳤어, 우라질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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