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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에게 필요한 건 르네만 알고 있다,
<쌩땅느>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 온라인상영작 국제경쟁 / 침묵에 대한 침묵을 위해

by 우란

*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 국재경쟁 (온라인상영작)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쌩땅느 Ste. Anne, 2021

캐나다, 실험, 80분

감독: 라인 베르메트



르네에게 필요한 건 르네만 알고 있다, <쌩땅느>



영화의 시작은 사람의 첫인상과 같다. 소설의 첫 장을 읽고 단번에 이야기의 결말까지 상상하며 설레는 것처럼. 롤러코스터를 타고 첫 번째 하강 지점에서 앞으로 있을 스펙터클한 철길을 스릴 있게 만끽하는 것처럼. 단 5분 만에 관객의 집중을 확 끌어올리는 영화는 늘 첫인상이 강렬했다. <쌩땅느>가 내게 그랬다. 물론 처음엔 어지러웠다. 불꽃놀이를 기다리는 고요한 흥분이 아니라, 전쟁 영화의 첫 장면에 자주 등장하는 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걸 보고 있는 무기력한 불안이었다. 음울하고 음침한 숲만큼이나 심장을 조여 오는 음악도 쉽게 마음을 놓지 못한 요인이었는데, 그 한가운데에 여자가 소리 없이 등장했다.


계곡 앞의 앙상한 나무를 향해 가는 여자. 터덜터덜 걷지만 고개는 오로지 정면, 다른 곳을 볼 여유가 없는 것처럼 초초하게 보이는 게 아니라, 반드시 그곳에 가야만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우린 계곡에 점점 가까워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당장이라도 그녀가 뛰어내릴 것 같은 불길함에 사로잡힌다. 심장박동수가 빨라지면서 긴장감이 극도로 고조되는 순간, 여자가 사라지고 카메라가 계곡을 비춘다. 바위 위에 서 있어야 할 여자가 사라지고 없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dd21621665e8c5d0895cfe2e8f7f7d78df3257de.jpg 출처: 영화 <쌩땅느> 스틸컷 (다음)

<쌩땅느>는 4년 동안 실종된 누나, 르네가 동생(모데스트) 부부의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딸 아텐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르네 실종사건으로 4년 동안 아픔과 슬픔을 견뎌 온 모데스트의 개인 속사정은 후방으로 밀려나 있다. 르네가 그동안 있었던 일을 털어놓으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일종의 '드러내기식 치유 스토리'도 없다. 비극적인 사건으로 해체된 가족이 다시 하나로 뭉쳐지는 과정을 이해하기 쉽게 보여주는 메시지와도 거리가 멀다. 모든 게 르네의 중심으로 돌아가지만, 정작 그녀가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장면은 없다. 하지만 <쌩땅느>는 하고 싶은 말을 전부 하고 있었다. 번번이 날아간 초점, 눈을 뜨고 보기 힘들 정도의 섬광,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암전,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지지직거리는 화면을 보며 <쌩땅느>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는 걸 피로하게 느끼지만 않길 바랄 뿐이다. 난 좋았고, 흥미로웠다. 모든 영화가 그렇듯, 모든 장면엔 이유가 있으니까.


아텐은 자신이 기억하던 엄마와 다른 르네의 모습이 낯설다. 르네 역시 예쁘게 커준 아텐과 대화 조차 나누기 어렵다. 4년이란 시간 동안 모데스트와 그의 아내, 엘레노르가 아텐의 아빠, 엄마였다. 특히 엘레노르는 누구보다 '친자식과 다름없게'란 비교조차 의미 없을 정도로, 아텐을 사랑하는 딸로 키우고 있었다. 친구들에게 두 명의 엄마가 생긴 걸 "내가 운이 좋은가 봐."라며 웃어넘긴 아텐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아이가 얼마나 사랑을 받으며 컸는지를. 르네는 어릴 적 추억이 담긴 가족앨범을 보며 말하고 웃기 시작한다. 잊어버릴 수 없는 나의 과거, 시간의 기록을 보며 4년이란 시간의 공백에서 점차 벗어나는 르네. 르네와 아텐은 가족앨범을 통해 가까워진다. 사진은 그녀가 나를 다시 찾는 과정을 위한 리마인더였고, 아텐은 친엄마와 사진으로 감정을 공유하며 유대감을 형성한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엘레노르는 불안하기만 하다. 좀처럼 속을 알 수 없는 르네가 어느 날 갑자기 아텐을 데리고 가겠다고 할지 모르기에. 모데스트는 그런 아내를 안심시키지만, 그 역시 누나에게 4년의 공백을 듣고 싶다. 누나를 배려해 어떠한 말도 먼저 꺼내지 않고 있지만 그렇다고 르네의 침묵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순 없다.

6add084eec292adc6f8c8cbb025a91dca03ac141.jpg 출처: 영화 <쌩땅느> 스틸컷 (다음)

사람들은 늘 사건에 대한 이유를 듣고 싶다. 사건이 왜 벌어졌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실 미친 듯이 궁금한 만큼 답답하지 않으면서, 사건 당사자보다 아프고 힘들지 않으면서 꼭 알아야 하는 위치에 있는 것처럼 요구한다. 물론 동생이 누나에게 일어난 사건의 내막을 알아야 하는 건, 그녈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동생에겐 그동안 쌓아왔던 힘든 감정을 조금이라도 털어내야 하는 목적도 분명히 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당사자인 르네가 말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거다.

이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는 르네의 침묵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여, <쌩땅느>는 인간관계를 비롯해 자기 자신에게까지 '침묵'하는 르네를 대신해 여러 장치를 사용한다. 르네가 조금씩 변하는 계기와 딸과의 관계 개선 직전에 늘 '할머니와 떠돌이 개'를 삽입한다. 할머니를 경계하던 개가 그녀가 준 물 한 접시로 경계를 풀고 할머니와 가까워지는 데, 영화는 이 이야기를 조각조각 잘라, 르네의 이야기로 채운다. 검은 하늘에 뜬 달, 나무, 계곡, 물, 불, 스산한 바람소리, 짐승의 울음소리,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 차 사이렌과 사람들이 싸우는 소리 등, 앞서 말했던 수많은 자연과 특수 효과들은 르네의 입술을 대신한다. 아버지가 등장해 르네가 앞으로 원하는 것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작품 자체가 르네의 깊숙한 내면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한다. 르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다 현재 르네의 심리상태와 그녀가 빠져나올 수 없는 '무엇'이 있다는 걸 어렵고 난잡하게 드러낸다. "난 보여는 줄 테니 알아서 받아들여라." 딱 실험영화의 언어들이다.

5dc1d0d78cabad56462f567e8f259207483a4bb3.jpg 출처: 영화 <쌩땅느> 스틸컷 (다음)

무표정 밖에 지을 줄 몰랐던 르네는 조금씩 웃기 시작하며 긴 침묵을 깬다. 아텐에게 빈 땅이 담긴 플로라이드를 보여주며, 자신의 계획이자 꿈을 얘기한다. 센 강 근처에 있는 매나토바 쌩땅느에 예쁜 집을 짓고 함께 사는 것. 과거 부모님의 꿈이었다 말하며 아텐의 마음을 사는 데 성공한다. 이를 불안하게 보는 동생 부부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다. 떠날 거란 누나의 말에, 동생은 도망친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다며 그동안의 원망과 분노를 토해낸다. 그러나 역시 르네는 동생의 반응에 대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지막 장면에서 아텐과 함께 식당에서 밥을 먹고 함께 나가버린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빈 땅, 쌩땅느가 틀림없다.

결국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동생 부부는 아텐을 잃어버린 시간을 견뎌야 할지도 모른다. 아텐이 돌아올 수도 있고 르네가 다시 사라질 수도 있다. 어떠한 지점에서도 명확한 결말, 딱 정점을 찍은 사건이 없다. 자, 독단적이기만 한 르네를 어디까지 지지해야 할까. 정말 그녀는 실종된 게 맞을까? 자발적 도망이 아녔을까? 르네와 아텐의 동행이 안전한 걸까? 잘 살고 있는 아텐에게 불행이 닥치는 건 아닐까? 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쌩땅느>는 분명 르네를 보여주기 위해 제각각의 이야기를 하나로 연결해 살아 숨 쉬는 유기체처럼 엮었다. 또 실제로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끝에 다다르고 보니 처음과 달라진 게 없다. 오히려 의문만 더 늘어났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밝았던 섬광에게 다시 집어삼켜진 느낌이랄까. 아무리 그래도 침묵도 엄연히 선택인데, 응당 선택한 책임을 져야 하지 않나. 르네가 책임진 건 폴라로이드 한 장, 아니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그들의 마지막 모습도 불안하게 보일 수밖에.


길 잃기 딱 좋지만, 중요한 건 뭐다? 끝까지 4년의 시간을 함구하겠단 르네의 결정이다.

난 처음부터 그녀의 결정에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아닌 척했으나 섬광이 터지고 모든 걸 집어삼킬 듯한 어둠을 접하며 첫 장면에서 르네가 계곡에서 왜 사라졌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것도 아주 열정적으로.

7495338707258c3bf08461f5e31ae59c60363094.jpg 출처: 영화 <쌩땅느> 스틸컷 (다음)

처음부터 물어본다고 대답을 해줄 작품이 아니었다. 답답함에 영화의 이야기가 빈약하다고, 뼈대만 있어 재미와 흥미가 떨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끝에서 다시 시작을 떠올린 나의 견해는 다르다. 빈약함과 앙상한 뼈대는 <쌩땅느>가 관객을 위해 만든 빈 공란이다. 어딘지 알 수도 없는 르네만의 쌩땅느이기도 하다. 영화는 여러 가지 사건을 잘라 조금씩 노출하면서 내가 직접 빈 공란을 열성적으로 채우길 원했다. 그래야만 이 여정이 전부 '침묵에 대한 침묵'을 위해 달려온 거란 사실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침묵에 대한 침묵. <쌩땅느>가 남긴 건, 침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침묵이다. 아텐이 르네와 엘레노르에게 각각 엄마란 호칭을 쓰는 것도, 르네와 동생 부부의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어떠한 말도 꺼내지 말라는 것. 르네가 원하는 걸 도저히 알 수 없을지라도 그냥 보기만 하라는 것. 누구나 침묵할 권리가 있다. 말을 꺼내는 동시에 여러 갈래로 찢어지는 의미와 감정들을 견디지 못하는 르네에겐 침묵은 반드시 필요했다.

'모든 행동엔 이유가 있고, 원인엔 결과가 있다.'는 시선으로만 봤으니 <쌩땅느>가 어색할 수밖에. 마지막까지 어지러웠던 건, 계속 머릿속에 첫 장면이 잔상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녀가 4년 전의 그녀일 수도 있겠단 추측을 하면서도, 자신이 산 빈 땅으로 가는 길일 수도 있겠다 바꿔 예상하기도 했다. 계속 첫 장면의 르네의 뒷모습이 아른거렸다. 소란스럽게 떠들던 내 집착에 마침내 '침묵'이 찾아왔다. 나에게 침묵이란 무엇일까. 한 인간으로서 타인의 침묵을, 내가 필요로 했던 침묵을 생각했다. 난 내가 원한 침묵은 끝까지 지켜내면서, 타인의 침묵은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쌩땅느>가 마음을 어지럽힌 건 당연했다. 그래서 강렬했다. 답이 필요없는 문제를 힘들게 잡고 있어 버겁기도 했지만, 한 번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문제였다.


반복적으로 같은 단어가 굳게 닫힌 입술 밖으로 뛰어나왔다. '나는...'

아니,

르네에게 필요한 건 르네만 알고 있다.

"난 믿는 게 별로 없어. 상황이 진정되지 않으면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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