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란 Jun 12. 2022

겹겹의 검은 욕조 / 김연아 시인

싫어도 해야 하는 삶은 할 수 있을 때 해야만 한다.

겹겹의 검은 욕조 김연아



밤의 목구멍으로 침투하는

말 못하는 존재가 있다


누가 밤 속에 그녀의 얼굴을 갖다 놓았나?


나는 욕망한다 다른 경계를

다른 태어남을

나의 몰락, 나의 검은 천사야


하품하는 심연을 다리 사이에 지니고

핏속에 있는 이 길을 걸어, 아가씨야


밤의 뒤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녀는 내 배 위로 검은 망토를 던졌다

내가 울부짖으며 나온 곳으로

그녀가 나를 빨아들였다


깊숙하고 고독한 욕조 안

그녀는 나를 안고

물고기처럼 말이 없다

서로의 몸이 메워지고 밀봉되어

우리는 다른 세계로 잠수해갔다


시간에 앞서 있었던 것

감은 눈 안으로 잃어버린 어떤 것


원시의 달과

대양 사이를 오갔던 안개처럼

부드럽게, 천천히 그녀는 나를 지웠다

물의 끝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내부로 빨려 들어갔다


거대한 밤의 욕조 안에서

녹색 게자리가 작은 발을 내민다

최초의 여명에 홀리듯이

영혼을 다른 영혼으로 옮기듯이







계간《청색종이》

2022년 봄호



나는 그래

새로움에 목말랐던 때가 있었다. 꼭 다른 일을 하고 싶었다.
다른 일이라 해서 선택한 일들이 결국 같은 일이란 걸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당연하게 나는 색다른 짓을 하고 있다 믿었다.

꼭 내가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는데,
가만 생각해보면 사실 나는 그 입속의 떨림을 느끼고 싶었던 거다.

뱉어낸 것들을 다시 꼭꼭 씹어서 내 안으로 삼킬 때,
좋은 것이라 믿었던 말들이 한순간 숨기고 있던 화살촉을 들이밀 때,
본질을 삼킨 어둠을 장난스럽게 빛이라 부를 때, 
나는 꼭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내가 쌓아 올린 층들이 거대한 도끼에 맞서 싸울 힘을 잃고
두 동강이 났을 때, 그 안에 감춰진 겹겹의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
나는 내가 그토록 가기 싫었던, 그래서 궁금했던
그곳에 당도한 것 같았다. 해서 목구멍부터 차오르는 눈물을 토해낼 수 있었다.

나는 표현하는 법보다 관찰하는 게 특기라
검은 욕조가 익숙하다.
틀린 것을 옳다고 말하는 게 어려워서 
잠수할 때 눈을 뜨지 않고 
옳은 것을 옳다 우기는 게 난처해서 
늘 물 밖에서도 눈을 감은 채로 유영한다.

나의 세계에서 나는 말 못 하는 존재. 
그래서 여러 말이 필요치 않아 무작정 헤엄치는 걸 좋아한다.
영혼을 다른 영혼에 덧씌우는 일은
새로움에 목말라있던 내게 새로운 일이라. 
아니, 결국 다 같은 일이라 할 수 있는 일.

싫어도 해야 하는 삶은 할 수 있을 때 해야만 한다.
그렇다더라. 나의 것들이.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거야 / 안희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