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끔하지만,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그러나 결국 나의 이야기.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호랑이의 해, 2011 제작
칠레 / 82분 / 드라마
감독: 세바스티안 렐리오 /
이 영화는 2010년 칠레에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호랑이의 해>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어두컴컴하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화면 속에 담긴 마누엘의 말없는 하늘은 잿빛이 가득하고, 그를 보는 관객들은 마른침만 삼키게 된다.
죄수 마누엘은 지진을 틈타 탈옥한다. 자유를 만끽할 시간도 없이 그는 지붕이 날아간 집 안에서 죽어있는 어머니를 발견한다. 마누엘은 아내와 딸의 죽음을 짐작하며 좌절한다. 슬퍼하거나 울부짖을 시간도 없는 죄수. 그는 어머니를 묻고 걷고 또 걷는다. 지진과 쓰나미로 쑥대밭이 된 세상에서 그는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그의 단순한 운명은 <호랑이의 해>의 중심축이다.
우리에 갇힌 호랑이의 등장은 마누엘의 운명에 찾아온 가장 강력한 변수다. 자신처럼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짐승의 두 눈을 보고, 그는 남은 힘을 모아 창살문을 부수고 달아난다. 그러나 그 호랑이는 계속 마누엘의 눈에 띈다. 마누엘과 호랑이는 자유로운 몸으로 창살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 갇힌 채 떠돌고 있음이 분명했다.
마누엘은 호랑이를 본 그날 저녁, 단 한 발의 총성을 듣고 깨어난다. 다음날 아침, 그는 자신에게 찾아온 죽음을 또다시 목격한다. 점차 자신이 정말 살아있는지 의심하는 마누엘. 그가 보는 것은 죄다 죽은 것들뿐이었고, 온몸에 가득 찬 상실감과 허무감이 계속해서 그의 세상을 무너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누엘과 옥수수 밭주인의 만남은 <호랑이의 해>에서 가장 격렬한 전장과 같았다. 옥수수를 훔쳐먹다 주인에게 걸려 도둑질 한 대가로 그의 부서진 집을 치워주기 시작한 마누엘. 그 이후 주인공은 주인 남자의 일방적인 대화법에 빨려 들어간다. 출구는 그의 눈에도, 관객들의 눈에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남자의 무지막지한 언어들은 마누엘을 점점 흔들기 시작한다. 술에 잔뜩 취한 주인 남자는 지진이 난 이유를 하느님의 뜻으로 해석하기에 이른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살잖아. 그러니까 자신의 죄를 모르고 살기 때문에 하느님이 벌하는 거지. 내가 어제저녁에 호랑이를 총으로 쏴 죽였어. 엄청 큰 놈이었지."
본래 말이 많으면 그만큼 자신을 아무런 보호벽 없이 드러내게 된다.
"딸이 이제 8살 됐어요."
"형씨 이제 받아들여야 해. 힘든 건 알지만."
사실 그 말은 어떤 말도 입 밖으로 꺼낼 줄 몰랐던 마누엘의 가슴 저린 한 마디였다.
자신의 딸이 내년에는 9살이 될 것이라는 의식적인 소망에서 나타난 비탄적인 울음이었다.
그러나 주인 남자는 너무나도 폭력적인 말과 행동으로 마누엘에게 모든 것이 무너진 세상을 마주하게 한다. 나아가 자신의 죄를 하느님께 고백하며 자신을 죽여달라 괴성을 지른다.
"나를 죽여줘요, 나를 데려가세요."
마누엘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저 모닥불 앞에 앉아 주인 남자의 모든 행위를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곤 새벽에 억누르고 있던 감정들을 유일하게 숨 쉬고 있는 생명에게 마구잡이로 휘두른다. 사방에 흩어진 깨진 유리조각 사이로 붉은 피가 흩뿌려졌고, 가장 큰 조각은 남자를 제일 빠른 하늘길로 인도했다.
마누엘은 더 이상 도망 다닐 수 없는 현실에 순응한다. 아니 자신은 처음부터 도망칠 수 없었음을, 자신만이 이 모든 불행을 끝낼 수 있음을 깨닫는다.
결국 그는 경찰들의 이목을 끌고자 난동을 부리고 그렇게 <호랑이의 해>는 끝난다.
인간은 언제부터 자신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아니 정말 우리에게 누릴 수 있는 완벽한 자유가 존재할까.
자연에게 우린 정말 작은 존재이며, 어디든 속박되어 있는데...
마누엘이 정처 없이 걷는 장면마다 등장하는 "나 길을 떠나네 가나안 땅을 향해서"란 노래는 이 영화의 모든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었다. 지진 덕에 탈옥한 마누엘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그린 <호랑이의 해>의 스토리는 깔끔했고 정확했다. 군더더기 없는 느낌이랄까. 그러면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호랑이의 해>의 묘미는 마누엘의 쉽게 읽을 수 없는 섬세한 감정표현과 무서울 정도로 절제된 행동이었다.
한 마디로 무자비한 세상 앞에 놓인 한 남자의 너무나도 정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런 그를 움직이게 한 존재가 바로 우리 안 호랑이었다. 마누엘은 호랑이를 구해주고, 피하고, 호랑이의 죽음을 목격하고, 그 죽음에 대한 복수를 감행한다. <호랑이의 해>에서 호랑이는 그만큼 중요한 존재다.
자연과 마찬가지로 호랑이는 인간이 흔들어 놓을 순 있지만, 어찌할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의 의지와 행동으론 절대 바꿀 수 없으며, 언제든 죽음을 물고 올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존재는 우리에 갇혀있음으로써 마누엘에게 잠시 동안 동병상련의 느낌을 주면서 그냥 사람으로 비친다.
결국 호랑이는 마누엘의 다른 자아이다. 왜 잡히면 안 되는지 모르고 끊임없이 도망치는 그의 무의식적인 자아. 결코 누릴 수 없는 무한한 자유를 향한 처량한 움직임. 따라서 주인 남자의 죽음은 어쩌면 이미 예정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마누엘의 불안한 세상이었지만, 전부였던 세계를 뒤집어엎은 셈이니까.
<호랑이의 해>는 다소 어려운 영화다. 자유를 위한 투쟁도 아니었고, 삶의 이유를 찾는 여정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자연의 위대함이나 두려움을 얘기하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정해진 결말도 없는 게 이 영화의 특징이다.
그러나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뚜렷하다. <호랑이의 해>의 속삭임 안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실감과 알 수 없는 두려움, 그럼에도 계속 살아나가야 하는 허망한 움직임을 내포하고 있다. 도망자 마누엘의 세상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 현실의 인해, 붉은 핏방울이 맺힌 깨진 유리조각이 분명 어딘가 있을 텐데.
영영 찾을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