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안착하는 걸 방해했던 것
지금껏 그걸 모르고 살았다
빛나는 내일이 가지고 싶던 때도
꿈틀대는 건 어두운 배경이었을 뿐
웃었으나 울었고
사랑했으나 미워했다
모든 게 다시 배경이 되었다
그러므로 먼 길이 내게 허락된다면
단지 적만만 취하고
망각의 강 앞에 혼자 서고 싶다
이제 믿는 건 내 배경밖에 없으므로
나는 그래
기분이 덜 상하는 일을 겪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기분 상하는 일은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어떤 노력을 해도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어도
그 기분을 느끼는 주체인 내가
덜, 조금, 아주 사소하게 받아들일 수는 있지 않을까.
그래서 괴로운 일을 겪어도
원초적인 고통의 부피와 밀도보단 작고 옅게 겪고 싶다고.
기분 좋은 일들을 바라는 건 게으름과 같다.
행복과 기쁨, 설렘, 흥분은 일상 속에서
내가 얼마든지 찾아 건져 올릴 수 있으니까.
내가 좋으면 좋고 기쁘면 기쁘니 그것만큼 쉬운 일도 없다.
그러나 기분이 덜 상하는 일을 겪고, 겪어내고 싶은 마음만이
내 배경을 만드는 일에 관여한다.
단순히 발만 걸쳐놓은 게 아니라서
덜 무시하고 덜 신경 쓰는 건 허용치 않는다.
아마, 내가 '덜'에 온 신경을 쏟는 이유일 거다.
아무튼 그래서인지 나의 배경을 떠올리면 오묘하다.
애매모호한 게 '흐릿한 원거리' 같지만
내 쪽은 뭔가, 그러니까 무언가 결여되어 있는 듯하다.
마치 그리다 만 것들이 마구잡이로 섞여있는 것 같다.
미완성으로 남은 그때의 나와 그 순간의 내가
간신히 서로를 알아보고 손만 잡고 있는, 그런 형태랄까.
내게 되려 힘을 주는 것 같기도 하면서
이렇게 만든 날 책망하는 것 같은.
시작만 하고, 출발선만 지나치는 삶을 살고 있는 기분.
가끔은 이 기분을 덜 받고 싶어 한 적도 있었다.
이 순간에도 내 배경은 소리소문 없이 채워지고
사라지고, 또 채워지고 있었겠지.
내 배경을 마주하고 깨달은 점이 딱 하나 있다.
'덜', '덜', '덜'의 주체는 배경의 주인과 같은 자라는 점.
그리고 그 자는 매일 같이 배경을 우려한다.
'이제 믿는 건 내 배경밖에 없으므로'
그가 '적막'과 '망각의 강'이 필요하듯
난 우려를 덜어내기 위해 '덜'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