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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투쟁 / 안희연 시인

by 우란

나의 투쟁 / 안희연



티브이에선 이국적인 화면이 방송되고 있다

열대기후가 아닌 곳에서 열대 과일을 재배하려다보니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어요


엔젤농장의 주인인 그는

이곳으로 저곳을 옮겨오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온도라고 설명한다

반으로 갈린 핑거라임의 속살이 붉다


나는 생각에 잠긴다

기를 수 없는 것을 기르려면

물속에 잠긴 사람들을 이곳으로 데려오려면

미래는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티브이에선 한파에 대비한 토막 건강 상식이 이어지고 있다


인간의 체온은 일도만 낮아져도 면역력이 삼십 퍼센트나 감소합니다 계피와 생강은 체온을 높이는 데 좋은 음식이지요


보일러를 틀고 물을 끓인다

이런 생활을 지속하는 한

이곳은 영영 저곳이 되지 못할 것이다


안전한 곳에 있으면 안전한 사람이 되겠지

이불 속 악몽을 악몽의 전부라 여기며 살겠지

하지만 기를 수 없는 것을 기르려면


도움닫기와 점프

뜀틀을 뛰어넘는 법은 단순한데

왜 번번이 뜀틀에 주저앉고 마는 걸까

겨울에서 겨울로

더 가파른 겨울로

양을 몰고 가는 상상을 한다

늑대의 목에 달린 방울을

미래라 부르는 사람이 되려고

주저앉은 뜀틀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그래도 나는 사랑한다



(주)창비

창비시선 446

안희연 시집,『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2020

124-126쪽



나는 그래


뉴스를 틀어놓고 삶이 만드는 나를 조금 들여다본다
티브이를 보는 일보다 티브이를 듣는 일이 익숙하다는 걸 깨닫는다
내가 삶을 만들고 있는 중이란 사실보다
빠른 인식이라 조금 머뭇거리기도 하고.

'기를 수 없는 것을 기르려면'
도전일까
도전을 부추기는 용기일까
용기를 갖게 하는 두려움?
두려움을 용인하는 마음인가

또 가만히 생각하다 보니
'미래는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는 걸 인정해 버리고
'인간의 체온'을 빌미로 괜찮아, 괜찮아 되뇌고
나는 안전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도 해보고
다시, 삶이 만드는 나를 떠올리고.

쫓기고 있는 중이구나 싶을,
그때와 지금, 앞으로의 나를 그려보니
꽤 '이국적인 화면이 방송되고' 있었다.
이것이 낯설음인지 아닌지 아직 판단하진 않았고.

마음의 온도를 높이는 일.
두려움의 층계를 높이는 일.
어떻게든 한 계단 위로 올라가려는 일.
나의 투쟁이라 부르고,
나의 투쟁이라 하고.

이렇게 이어지는 거겠지.
나아간다 반복하면서
계속 같은 그래프를 그리고 또 그리고
나도, 그렇다.
그래도 동시에 그러해서,
어쩔 수 없이 또 당연히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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