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란 Dec 09. 2017

 누구의 시선에만 머무르지 않는   
세 마디의 힘

<야간근무> 와 닿지 않을 수 없는 감정과 숨길 수 없는 위로.


<야간근무> (2017)

감독: 김정은 / 출연: 정예주, 김예은 / 드라마 / 27분 / 한국


     

  누구의 시선에만 머무르지 않는 세 마디의 힘

     

     

  가끔은 어른들의 이해보단 나와 같은 선상에 있는 이들의 숨길 수 없는 위로가 더 간절하다. 자신의 상황을 딱 잘라 말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그 마음을 어디 숨겨놓을 데도 없을 땐 더욱더 그립다. 방황은 할수록 버겁고, 오해는 언제나 달고, 후회는 사치다. <야간근무>는 이 모든 것을 구구절절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저 나와, 우리와 같은 두 친구를 소개할 뿐이다.

  

출처: 영화 <야간근무> 중

   

  연희와 린은 공장에서 함께 야간근무를 하는 동료다. 한국인 연희는 학교를 휴학하고, 답답한 자신의 미래를 다시 세우기 위해, 린은 하고 싶은 공부를 포기하고 캄보디아에 있는 가족에게 보탬이 되기 위해 공장 일을 시작했다. 그들이 언제부터 야간근무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의 시작은 너무나도 익숙한 두 친구의 출근길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가 지는 노을을 향해 함께 출근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 알 수 없는 다양한 감정들이 복받쳐올 것이다. 알 수는 없지만, 이유는 분명히 있는.  

  연희는 하고 싶은 게 없어서 문제다. 현실과 이상을 너무 명확히 구분 짓고 있지만, 그녀는 사실 그 어디에도 살고 있지 않다. 사장님의 되지도 않는 희망 고문을 관심도 없지만 틈만 나면 성실히 들어야 하고, 퇴근길마다 출근하는 자신의 또래들을 봐야 한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허탈감을 떨치지 못해 오늘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표류하고 있을 뿐이다. 린이라고 다를까. 린은 매일 가족이, 엄마가 그립다. 한국인 노동자들이 쉬는 날에도 나와서 일을 해야 하는 설움은 어떻게 참더라도, 사랑하는 이들의 그리움과 공부를 향한 갈증은 쉽게 나아지지 않는다. 그런 두 친구의 작은 소원은 함께 바다를 보러 가는 것이다.  

  <야간근무>의 백미는 이 이후부터 쭉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엇갈리는 두 친구의 입장이 물 흐르듯 교차편집되고, 꼭 필요한 대사들을 통해 그들은 같은 공간에서 다르지 않은 고민으로 함께 긴 한숨을 내쉰다. 동시에 연희와 린을 바라보는 모두가 똑같이 답답함을 느끼며 자신을, 그들을 위로한다.

     

  “여기선 무시 안 당해.”

     

  호주로 떠난다는 연희를 향해 린은 서운함을 감추지 못한다. 이제 린에게 고장 난 자전거를 고치는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굳이 자국을 떠나 저 멀리 타지에서 온갖 차별을 당하면서 일을 하려는 연희를 린은 도통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린은 “넌 여기 온 거 후회해?”라고 묻는 연희의 질문에 말문이 턱 막힌다.

  사실 나의 힘듦과 타인의 힘듦을 비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그러나 우린 언제나 어리석어 자신도 모르게 남을 판단하며 나를 위로하려 한다. “다른 건 잘 몰라. 하지만 여기선 무시 안 당해.”란 린의 심층의 언어 랑그가 연희의 랑그와 연결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두 친구의 숨겨진 언어와 감정은 쉽게 맞닿을 수 없다. 각자의 인생에서 처음 겪어보는 감정들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을 테니까. 

  카메라는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 두 친구의 대화를 그저 관망한다. 그 강한 고집 덕에 <야간근무>의 빙하 아래 숨겨진 진정한 시선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는다. 


출처: 영화 <야간근무> 중

 

“애매하게 살고 싶지 않아.”

     

  한 번쯤은 생각해봤을 한 마디다.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은 불안감에 메말라가는 청춘들이 많을 테니까. 그때쯤 되면 평범하게 살았으면 하는 부모님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게 된다. 오히려 폭력적이고 무책임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디론가 소속되려는 욕망을 태어날 때부터 갖는다. 갓난아기가 엄마와 오직 울음으로만 소통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이해 못 할 난제도 아니다. 소속되는 순간 맛보는 안정감이란, 달콤한 사탕과 같다. 특히 맨몸으로 세상에 내던져진 오늘날의 청춘들에게 꿈과 일은 별개의 문제이기에 더더욱 간절하다.

  그러나 사회는 이를 방관한다. 그 사회 속에 속한 어른들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분노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호주로 유학을 가려는 연희를 상담해주는 상담사는 두려움이 가득한 그녀를 배려해주지 않는다. “본인이 가셔서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배우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어요. 직접 가서 부딪혀봐야 알겠죠?”라며 어떠한 확답도, 확신도 연희에게 주지 않는다. 책임질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그녀의 태도에서 이미 우린 또 한 번 사회의 이중인격을 경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희의 결단은 확고했다. 어떻게든 나아가지 않으면, 빛을 영영 볼 수 없다는 끈질긴 자기와의 싸움에서 그녀는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다. 낯선 곳에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더라도, 더는 지체할 수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우리니까. 우린 분명 사회에선 안타까워도 어찌해 줄 수 없는 애어른이지만, 집에선 책임지고 보여줘야 할 게 많은 완전한 어른이다. 그래서 그녀는, 우린 “그냥 일했어요. 계속 일하고 또 일하고…”라고만 되뇔 뿐이다.

  자전거를 고치러 시내에 나간 린은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는 연희를 우연히 보게 된다. 아마 한국인이기 때문에 절대 무시받지 않고, 쉽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을 거라 말했던 자신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연희가 결코 자신과 다르지 않음을 그녀는 그제야 진정으로 깨닫는다.

  사실 앞으로 살아갈 삶에 대한 고민은 누구에게나 벅차고 힘들다는 걸 우린 우연을 통해서라도 보지 않으면, 절대 깨우칠 수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린 아직 보지도 않은 연희의 모습을 린의 눈동자에 그려 넣어 바라본 것이다.    

     

출처: 영화 <야간근무> 중


“네가 가서 진짜 행복하면 좋겠어.”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던 연희를 찾아온 린. 멋쩍은 연희의 몸짓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린을 보며 우린 안도한다. 린을 보자마자 그녀의 고장 난 자전거를 살펴보는 연희의 모습은 더 이상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감정적으로 다툰 게 아니라 서로를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니까.

  바다를 보러 떠나는 두 친구의 짧은 여행길에 자진 동반해 따라갔던 우리도 분명 무언가를 가슴속에 품고 왔을 것이다. 자국을 떠나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오히려 좋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린의 진심이 드디어 연희의 감춰진 두려움에 닿는다. 처음 한국을 왔을 때의 린의 복잡한 그 기분을 연희 역시 느끼지 않을 수 없으니까. 분명 잘할 수 있을 거란 담담한 응원 속에 연희는 그제야 환하게 웃는다. 서로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없음에도 이해할 수 있는 그들의 암묵적인 믿음이 왜 그 상담사에게선 보이지 않았을까.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두 친구의 모습이 유독 잊히지 않는 게 가장 큰 이유일 듯싶다.     

     

  <야간근무>는 단 세 마디로 모든 것을 표현한다. 말하고자 하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짜임새 있는 대사와 카메라 전환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매번 똑같은 배경도 아름답게 보이는 힘을 갖고 있다. 린의 목소리로 연희의 삶을 보여주는 교차 편집은 더더욱 말이 필요 없다. 카메라의 움직임을 최대한 자제해 두 친구의 깊은 내면까지도 심도 있게 보여준다.

  특히 자신을 걱정하는 엄마에게 편지를 쓰는 린의 목소리와 새로운 인생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연희의 모습이 <야간근무>를 오래도록 기억하게 할 것이다.

     

  그 누구의 시선에만 머무르지 않던 고집은 끊임없이 연희와 린에 집중하면서 동시에 우릴 빼놓지 않는다.

  이야기의 끝자락, 공장에서 혼자 남아 일을 하던 린이 바라본 대상은 연희의 빈자리가 아니라, 숨죽이며 그녀를 지켜보던 ‘우리’였다. 종종 고갤 떨구는 ‘나’나, 담배를 손에만 들고 있는 ‘너’나, 혼자 있어도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우리’ 말이다.

     

  글_관객 동아리 씨네몽 김진실

     

 


PS. 이 비평문은 '제1회 전북겨울영화제 프로그램 노트'에 실린 글이기도 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여야 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