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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Mar 08. 2020

미운 기분을 구원해주는

기억과 고구마말랭이






어느 때와 다름없이 버스를 타고 퇴근하는 길 멍하니 창밖을 보다가 갑자기 내게 주어진 시간과 해야 하는 일들이 버겁게 느껴졌다. 말라비틀어지는 화분처럼 버스 의자 속으로 몸을 구기고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내 머리통 무게마저 내가 지고 있어야 할 무게같이 느껴졌다. 생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그건 일종의 습관이었기 때문에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도 어쩔 수가 없었다. 창밖을 보며 나 자신에게 짜증이 나던 그 순간 지난 설 외할머니께 인사드리던 장면이 떠올랐다. “갈게요. 할머니” 말하는 내 머리를 할머니는 꾹꾹 누르듯 몇 번 쓰담쓰담하셨다. 그 쓰다듬는 손길이 그때는 나를 따뜻하게 웃게 했고 지금은 나를 울게 했다. 기분이라는 것은 조금의 어긋난 일상에도 난데없이 굴러오는 눈덩이처럼 사람을 짓누르다가도 아주 사소한 기억 하나만으로도 너무 하찮은 수증기처럼 쉽게 들떠 버린다. 그 날 특별한 말을 하시지 않았지만 그저 잘 가거라. 밥 잘 챙겨 먹고. 하며 쓰담해 준 할머니의 손길이 나를 살게 할 거라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내가 세상 못나고 무가치한 것 같다는 생각에는 브레이크가 없다. 얼마나 떨어질까 바닥도 정해져 있지 않다. 언제 찾아와서 언제 갈지 기간이 정해져 있지도 않다. 그런 무기력한 순간에 나를 조금 웃게 하는,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기억들이 있다. 나조차도 나를 궁지로 몰아넣을 때 숨통이 틔게 해주는 기억이 떠오르는 순간.


 

작년 초 워싱턴에서 친구와 토마스 제퍼슨 기념관 밖에 앉아 포토맥 강 너머로 지는 해를 보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날씨가 바람과 비로 엉망이라 다니는데 애를 먹었는데 그 날은 춥긴 했지만 맑고 바람도 적었다. 그때 우리는 사소하고 또 중요한 고민과 꿈 그리고 바람을 나눴다. 친구가 가져온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쌀쌀한 해 질 녘의 바람을 맞았다. 노을이 물들며 초 단위로 변하는 하늘과 그 하늘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를 구경했다. 그 주 나는 마음이 바빴고 친구는 일이 바빴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우리는 세상에서 제일 여유로운 사람이었다. 역시 그때는 알 수 없었지만 워싱턴에 다녀와 제일 자주 떠올린 기억이었다. 그 기억이 더운 여름의 짜증을 식혀주고 할 일이 너무 많아 다 해낼 수 있을까 긴장하거나, 아예 다 포기해버리고 싶던 순간 그 날의 여유를 끌어와 힘낼 수 있게 도와주었다. 


대체로 그런 기억들은 너무 사소한 장면이어서 그 순간에는 잘 알 수 없다. 내가 그 기억들을 자주 떠올리고 그로 인해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임을. 그래서 더 소중해지는지도 모르겠다. 역설적으로 큰 사건이나 큰 기쁨의 기억보다는 누군가와 보낸 편안하고 소중한 시간의 한 귀퉁이가 내 기분이 너무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잡아준다. 


몇 달 전, 오랜만에 고향 친구를 만나서 우리는 신세한탄은 조금 하고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자며 계획표를 짰다. 온갖 상상과 아이디어들이 마구 나왔다. 술 한 잔 안 마시고 카페인만 과다 복용한 채 허접한 그림과 표를 그리며 낄낄거렸다. 당장이라도 구독자가 백만이 될 것 같았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됐을 때 우리는 꼴이 좀 웃기지만 뭔가 개운한 감정이 있다고 얘기했다. 실제로 한 것은 없었지만 꼭 뭔가를 성취한 것만 같았다. 그즈음 우리에게는 모진 일들이 있었다. 바라는 것은 멀었고 당연한 줄 알았던 것들은 다 좌절됐다. 그래서인지 현실의 이야기보다는 그런 허황된 미래를 그리며 웃는 게 차라리 나았던 것 같다. 실제로 그 계획표를 전혀 단 하나도 실천하지 못했지만 사진으로 찍어둔 계획표를 가끔 보면서 열정적으로 회의하고 대박 난 것처럼 웃던 우리를 떠올리면서 조금씩 힘을 낼 수 있었다.


우울 속으로 가라앉는 순간은 예상치 못한 순간 너무 자주 찾아온다. 그럴 때 나는 내 기분조차 제대로 관리를 못한다고 나를 심하게 몰아붙인다. 별 일도 아닌 걸로 쓸데없이 우울해하고 무기력해하는 것 같아 너무 한심하게 느껴진다. 현실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헛된 꿈만 꾸고 있다고 다그친다. 하지만 친구와 함께 했던 그 순간은 나를 자주 웃음 짓게 했고 고인 웅덩이처럼 썩어가던 기분을 조금 흘러갈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니까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원인이 뭐가 됐든 그 기분을 다시 괜찮아질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누군가와 함께 하는 순간과 그리고 그 기억들 그리고 외할머니가 만들어 준 고구마 말랭이인가 보다. 아무에게도 나눠 주지 않고 아끼고 아끼며 야금야금 고구마 말랭이를 꺼내 질겅질겅 씹으며 나는 나를 괴롭히는 나를 씹고, 현실을 씹는다. 달달한 고구마 말랭이가 나를 힘나게 하고 따뜻한 사람들과의 소중한 기억들이 무겁게 가라앉는 나를 조금씩 떠오르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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