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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Mar 15. 2020

책을 가진다는 것은

공간과 비용에 대해





살고 있던 집과 들어갈 집의 계약기간이 안 맞아 얼마 간 임시거처에서 살아야 했다. 그 임시거처로 쓰기에 고시원만 한 곳이 없었다. 1달은 물론 심지어 주 단위로도 살 수 있으니까. 문제는 짐이었다. 내가 살기 전에 두 명이 살고 있던 너른 방에 살다가 고시원으로 들어가려니 가지고 있는 짐들을 다 처분해야 했다. 중고 물건 견적을 내는 사람처럼 방을 둘러봤다. 애초에 그렇게 짐이 많지도 않고 딱히 애착이 있던 물건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오히려 이 기회에 다 정리하고 버릴 수 있겠구나 싶었다. 몇 년 동안 잘 쓰고 필요한 것 같아 두었던 것들이 갑자기 다 버려야 할 짐으로 보였다. 


물론 책들도 전부 팔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책을 꺼내서 중고서점으로 가져가려니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돈 내고 짐을 맡기는 곳을 알아봤다. 알아보다 보니 정말 어리석은 짓인 것 같았다. 그곳까지 책을 가지고 가고 다시 가지고 오는 데에도 돈이 들뿐 아니라 그 공간을 쓰는 데에도 무시 못 할 돈이 들었다. 책을 팔면 돈을 낼 필요도 없고 얼마 안 되겠지만 오히려 돈을 벌 수 있는데, 그리고 다시 못 구할 귀한 책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중고서점에 가서 구할 수 있는 책들이 거의 대부분인데, 매일매일 읽기는커녕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책들이 훨씬 많은데 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싶었다. 



머리로는 책을 팔든 버리든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선뜻 실행에 못 옮기고 있었는데 지인이 책을 둘 공간을 내주겠다고 해서 책을 거기다 갖다 두게 되었다. 책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생각한 나는 쉬엄쉬엄 하루에 6~7권씩 옮기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책장에 들어있는 책을 바라보는 것과 책을 들고 옮기는 것 사이에는 미처 깨닫지 못한 엄청난 간극이 있었다. 책이라는 게 책장에 들어가 있으면 가벼워 보이고 자리도 별로 차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들고 옮기려면 새삼 그 무게를 깨닫는다. 거의 매일 6-7권씩 옮기다 이삿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는 여행용 배낭에 책을 꽉 채워 헉헉대며 옮겼다. 그렇게 다 들어 옮기니 책은 너무 무거웠고 너무 부피가 큰 것이었다. 


대체 왜 이런 멍청한 짓을 하고 있을까 싶던 그때 김연수 작가의 ‘소설가의 일’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김연수 작가는 ‘밤은 노래한다’를 집필할 당시 중국에 있다가 돌아올 때 거기서 사 모은 책들 때문에 비행기를 타지 못하고 박스에 담은 책들과 함께 기차와 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고 했다. 그 내용을 읽을 때 혹시나 누가 귀한 책들을 가져갈까 박스를 자리 옆에 두고 밤기차를 타고 있고 있는 작가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외국도 아닌 겨우 걸어서 20분 거리에 책을 지고 걸어가면서 생각해보니 그 장면은 낭만보다는 절망이나 자괴감에 조금 더 가까운 것이었다. 그 와중에 전자책 플랫폼에 신간을 선공개한 김영하 작가의 인터뷰를 읽어보니 내 상황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실제로 돈을 지불하고 책을 둘 공간을 사려했으니까.

https://n.news.naver.com/article/081/0003067335?l


대학 다닐 때 살던 좁아터진 고시원 책상 위에도 4칸짜리 책장이 있었다. 물론 진짜 공부를 하려고 고시원에 들어간 사람이 아닌 이상 그 책장을 책을 보관하는 용도로 쓰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고시원에 있는 모든 공간은 짐을 두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나 역시 전공책 몇 권을 꽂아둔 것을 제외하고는 거기다 밥그릇, 냄비, 수건 그런 것들을 거기다 두고 썼다. 책을 산다는 건 사는데 드는 비용뿐만 아니라 당장의 생활공간까지 줄어들게 만들고 몇 개월 후에 들고 가야 할 짐까지 늘리는 최악의 행위였다. 졸업을 하고 처음 제대로 자취를 한다고 얻은 원룸에 살게 됐을 때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은 늘어났지만 거기는 책장을 둘 공간이 없었다. 책은 바닥에 쌓였다. 


이사 갈 때 이삿짐 견적을 내러 온 직원이 책이 많으면 이삿짐 요금을 책정할 때 가격이 올라간다고 했다. 다행히 요금이 올라갈 정도의 양은 아니라고 했다. 요금이 더 오르지도 않았는데 나는 좀 치사하네 책 그거 뭐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왠지 모르게 책 대신 다른 것들이 들어있던 고시원의 책장을 떠올렸다. 굳이 이삿짐 견적을 내던 사람의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살고 있는 곳의 공간이 좁으면 책을 살 엄두가 잘 나지 않는다. 그리고 몇 개월에 한 번씩 떠나야 하는 공간에 있어도 마찬가지. 운이 좋아 너른 집에서 보통의 계약기간보다 오래 살았더니 책이 짐이라는 생각을 한동안 잊고 야금야금 사 모은 것이 꽤 큰 짐이 된 것이었다. 책이 그렇게 많아진지도 모르고 일일이 들고 나르다가 과연 이삿짐 요금을 더 받아야 할 만하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결국 책을 가진다는 것은 책값을 제외하고도 부수적인 비용이 더 필요한 것이었다, 책을 둘 공간에 대한 비용 그리고 그 책을 내가 원하는 곳에 가져다 두기 위한 비용까지. 


책이 짐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깨달은 나는 적어도 고시원에 있는 기간만큼은 책을 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동네 구경을 하다가 중고서점을 발견하고는 책이나 좀 읽다 나와야겠다는 마음으로 서점으로 들어가서 책 두 권을 사서 나왔다. 그리고 그 책들은 아직 다 읽지도 못했다. 대체 책을 왜 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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