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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Jun 22. 2020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드라마의 악역이자 조연인







오늘 B와 저녁 식사를 했어. 갑자기 불쑥 찾아왔더라. 엄청난 맛집을 알아왔다며 중국 요릿집을 가자고 했어. 커피나 한 잔 하고 말 거라고 예상했지 밥을 먹자고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해서 나는 살짝 당황했어. 딱히 허기지진 않았지만 그렇게 배가 고프지도 않았던 터라 갑자기 무슨 중국 요리냐고 그냥 매운 거나 먹고 싶다고 했던 내 대답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지. 그저 웅얼웅얼거리면서 B의 손에 등 떠밀려 길을 걸었어. B는 중국 요릿집을 가는 길에 매운 족발집을 보더니 대뜸 저기는 어떠냐고 하더라. 좋다고 했지. 족발이 마음에 들었다기보다는 그 순간에도 집에 돌아가는 길을 생각해서 조금이라도 집에 가까운 곳이라 마음에 들었지. B는 간판부터 맛집일 것 같다며 부산을 떨었어. 


해맑게 웃는 B를 보는데 우습게도 B가 참 부러운 거야. 아무렇지 않게 마음이 가는 이에게 찾아와서 밥을 먹자고 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하필 그 상대가 똑 부러지지 못하고 한심하게 우유부단해서 정신없이 몰아붙이면 같이 밥을 먹을 수도 있는 상황인 것. 그런 것들이 어이없게 부러웠어. B의 결과에 상관없이 말이지. 난 알아. B도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나는 아마 기억하지도 못할 내가 했던 사소한 말에 미소 지으며 행복해할 거라는 걸. 내가 그랬으니까. 또 지난번 예의상 했던 말을 지키라고 장난처럼 웃으며 또 찾아올 거라는 것도. 내가 그렇게 해볼까 말까 망설였던 것처럼. 그리고 아마 당분간 이 드라마 안의 주인공인 줄 알고 최선을 다할 거야. 최선을 다하면 우리 사이에 우연인 듯 필연이 계속 찾아오고 마침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해피엔딩이 될 거라고. 하지만 B는 모르고 있지. B의 드라마는 해피엔딩이 될 수 없을 거라는 걸. B는 다른 드라마를 찾아가야 하겠지. 그걸 언제 알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그 사실을 깨달았던 날. 내가 꿈꾸던 드라마가 해피엔딩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 드라마에서 나는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 심지어 악역이라는 걸 깨달았던 그 날. 나는 원효대교 밑을 지나 강을 따라 수많은 다리들을 지나 영동대교까지 걸었어. 그날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다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만큼을 걸어도 다리가 아프지 않았다는 건 정확히 기억나. 아마 주인공들 앞에서 계속 내 감정을 부정하며 변명하던 그 장면을 곱씹고 있었겠지. 두 사람 앞에서 그 소문들도 내 행동들도 다 오해라고 둘이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더 이상 내 걱정이나 내 눈치 보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돌아서 걸어가면서도 혹시라도 나를 붙잡으러 오지 않을까 그 순간까지도 내가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을까 어리석고 헛된 희망을 가졌었지. 그 헛된 기대를 다 깨부수고 흩어버리는데 그만큼의 걸음이 필요했는지도 몰라. 


B는 저녁만 먹고 가기 아쉬운 눈치였지만 부러울 사람이 없어 B를 부러워하고 있는 내 못난 마음을 더 이상 느끼고 싶지 않았어. 빨리 B에게 벗어나서 편해지고 싶어서 카페에서 커피를 테이크 아웃해서 B의 손에 들러 서둘러 보내고 나는 집 주변 골목을 한참 또 걸었어. 낮은 뜨겁지만 밤은 너무 시원한 꼭 속 시리던 그 날의 날씨 같았어. 그 좋은 계절을 온 힘을 다해 내 감정을 부정한 장면으로 엮어야 한다는 게 씁쓸했지만 커피는 달콤하고 시원해서 다행이었지.  그래도 그 최악의 장면에 이 계절의 덧칠이 조금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싶기도 했어.

 


언젠가 나도 어떤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는 날이 오겠지, 삐뚜름한 마음으로 나를 아껴주는 이를 남처럼 관찰하고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설레고 애틋한 마음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그런 날. 이렇게 보낼 수도 없는 편지를 더 이상 쓰지 않고 구석진 곳에 처박아 두고는 어디다 두었는지 잊어버리겠지. 하지만 그 날이 영영 올 것 같지 않은 나는 오늘도 이렇게 너에게 편지를 써. 답장을 받을 수도 바랄 수도 없는 편지를. 계절이 다시 돌아온 지금까지도 내 욕심은 사위지 못하고 왜 내가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없는지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단지 이렇게 혼자서 삭히고 네 인생에서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최선의 배려인지 자꾸만 묻고 또 묻고 싶어 져. 최선을 다하면 다 할수록 내 존재가 너에게 괴로움과 미움밖에 될 수 없었던 그럼에도 너를 미워하기는커녕 나를 미워해야만 했던, 주인공들 앞에서 없어져야만 행복을 줄 수 있는 역할이었던, 그 날 나의 긴 걸음도 어제의 편지도, 오늘의 산책도, 편지를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그 드라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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