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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Jul 02. 2020

무너진 세계의 끝

실패 너머로 걸어가기






작년 늦가을 김연수 작가의 강연을 들었다. 여러 작가들의 강의 중 하나를 선택해 신청하는 방식이었다. 아마 그 목록에는 당연히 어떤 내용으로 강연을 하는 지도 나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보지도 않고 단지 김연수 작가의 이름만 보고 신청 버튼을 눌렀다. 강연장에 도착해보니 강연의 제목이 ‘잘 못 살아도 괜찮아, 다시 살면 되니까’였다.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한 그는 가고 싶었던 대학에 떨어졌을 때 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갈 곳도 마땅하지 않고 할 것도 없던 그는 도서관에 앉아서 자신을 원망하며 아무렇게나 자신의 감정을 썼다. 그때의 상황과 감정을 묘사하고 있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떠오르는 내 인생의 한 지점이 있었다. 나는 대학 졸업을 한 학기 어쩌면 두 학기 정도 앞두고 있었고 김연수 작가와 비슷한 심정으로 도서관에 앉아 있었다. 졸업이 임박한 그제야 나는 전공으로 밥 벌어먹고 살기는 틀렸다는 것을, 재능이 아예 없다는 것을 완전히 인정해야 하는 처지였다. 대학에 떨어졌거나, 전공으로는 취직하기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실패라고 정의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겨우 그런 걸 실패라고 할 수 있냐고 다들 그렇게 산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완전한 실패로 정의되기도 한다. 계획하고 상상한 그 범위 안에서 차근차근 단계를 쌓아 가면, 최선을 다하면 될 거라고 예상했던 인생이 완벽하게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는 실패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자기가 믿어왔던 세계의 끝까지 온 것이고 여기를 넘어가게 되면 붕괴가 된다고 실패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외면하고 돌아서게 되는 것 같다고 그때의 심정을 표현했다.     



어쩌면 그전까지 애를 써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그런대로 순탄하게 살았던 인생에 고마움을 느꼈어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십 년가량 나름대로 규칙과 정의를 만들어 놓은 세계가 무너져 가는 것을 봐야 하는 것은 다른 측면을 볼 새도 없이 절망 그뿐이었다. 그 완전한 파괴의 너머 다른 세계가 있지만 그 시점의 나에게는 볼 수 있는 능력도 넘어갈 수 있는 용기도 없었다. 그저 실패를 버려두고 도망가고 싶었다. 비행기를 타면 불안하고 잠을 거의 자지도 못했지만 차라리 여기보다는 비행기를 타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결국 1학기를 남겨두고 말 그대로 부모님에게도 말하지 않고, 살고 있던 방도 정리하지 않은 채 새벽에 도망치듯 배낭여행을 떠났다. 


2년 전에도 휴학을 하고 배낭여행을 떠났던 터라 그때와 자꾸만 상황을 비교하게 되었다. 완벽하게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2년 전의 배낭여행은 내 계획안에서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고 다녀오면 예상한 미래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현재도 미래도 오로지 완벽한 실패자의 인생일 뿐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도망까지 치고 있는 인간이었다. 떠나기도 전부터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에게는 무슨 인생의 답을 찾으러 떠나는 사람마냥 태국을 거쳐 인도로 떠나겠다고 말했다. 태국 가면 싼 비행기표가 많다더라 그 말만 믿고 아무 대책 없이 태국에 도착했더니 연말 연초라 어디를 가는 비행기 표든 간에 내 예산을 거의 다 써야만 살 수 있었다. 표를 사서 어디든 도착하면 돈이 없어서 곧바로 한국으로 가야 할 판이었다. 


배낭여행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더 뜻대로 되지 않던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태국은 여러 나라와 육로로 통하고 있으니 버스를 타고 다니기로 했다. 머리로 결정은 했지만 몸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게스트 하우스에 며칠 연장 신청을 하고 방에서 제일 늦게 일어나 아점으로 게스트하우스 앞 포장마차에서 국수를 먹고 게스트하우스에서 추천해주는 관광지 딱 한 군데만 갔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면서 내 처지를 슬슬 잊어버릴 수 있었고 자학은 조금씩 사그라졌다. 다만 실패한 인간이라는 정의는 마음 안에 조그맣게 앉아 문득문득 내 속을 시리게 했다.

 


강연은 김연수 작가가 아무 생각 없이 계열까지 바꿔서 지원한 영문학과에 덜컥 붙었던 이야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단지 대학에 갔다고 해서 실패했다는 느낌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도 계속해서 뭘 해도 누구를 만나도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뭔가가 잘 못 됐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여기는 분명 몇 개월 전의 그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곳이니까. 그래서 수업도 거의 듣지 않고 도서관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고 했다. 결국 그 글이 쌓이고 싸여서 지금의 그를 만들어 준 것이지만 우리는 실패 속에 있을 때 그 장면이 정말 실패인지 사다리의 제일 밑이 될 것인지 결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나 역시 전혀 몰랐기 때문에 그 무더운 곳, 머리카락이 탈 정도로 땡볕이 내리쬐는 길을 걸으면서도 속이 시렸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헛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 여행을 기점으로 내 인생이 조금은 바뀌지 않을까 하는. 하지만 인생이 어느 기점으로 바뀌더라 그런 말은 모든 사건들이 흘러가고 나서야 비로소 돌아봤을 때 판단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돌아와 보니 내가 섣불리 상상했던, 무난하게 흘러가리라 예상했던 세계는 다 무너진 채 그대로 있었고 처리해나가야 할 문제들만 겨우 희미하게 보였다. 여행을 다녀와서 갑자기 내가 어떤 깨달음을 얻거나 모든 일이 잘 정리되고 목표를 향해 열심히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 뒤로도 꽤 오랫동안 나는 무기력했고 불안했고 무언가를 시작하기 두려웠다. 나 스스로에게 낙인찍어 놓은 쉽게 도망가는 실패자라는 정의가 언제나 나를 불러 세웠다. 사건 자체보다도 내가 정해놓은 틀 안에서 빠져나오는 시간이 훨씬 더 길었던 것 같다. 



그는 나보다 이십년 정도 인생을 더 살고 과거를 반추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순간이 결코 실패가 아니라는 것, 어쩌면 차라리 더 좋은 선택이 되었다는 것을 확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제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 되었지만 단 한 사람만 모르고 있다고 했다. 20대 초반의 대학생 김연수. 인생의 마무리를 앞두고 있는 사람은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자신의 일생을 볼 수 있지만 아직 젊은 우리는 그럴 수가 없다고 그렇기에 정말 실패의 순간이 될지 새로운 세계의 시작점이 될지는 살아봐야 알 수 있다고. 이 점에서 소설 쓰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고 했다. 소설을 쓸 때 그 주인공이 실패를 겪거나 소설이 진행되지 않을 것 같다고 느끼면 소설은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 그래서 소설은 끝까지 진행되기 어렵지만 생은 쉽게 그만둘 수 없기 때문에 실패의 순간을 너무 급하게 단정 짓지 말고 조금 더 살아보면 좋겠다고. 


강연을 듣고 나와 조금씩 어둑해지는 길을 걸으며 아주 오랜만에 삶에 기대를 가지는 가벼운 마음을 느꼈다. 늘 내 인생 한 구석에 그늘을 드리우던 짐짝을 예상치 못하게 그가 치워 준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내가 실패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의 의미를 아직은 선명히 알 수 없는 상태다. 다만 무너진 세상을 넘어서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지 않고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걸었던 시간은 끝난 것 같다. 내 속, 내 발끝만 보느라 알 수 없었지만 다 무너지고 벽으로 막혀 있을 것 같던 끝나버릴 것 같던 세계는 계속 펼쳐져 있었다는 것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제 걸어온 세상을 돌아보면서 실패 이후의 순간들을 조금씩 다시 정의해나간다. 내가 원했던, 상상했던 곳이 아닐지라도 조금 더 살아 보면 그 세계가 어느 날은 내가 계획했던 세계보다 괜찮은 곳으로 보이기도 하고 실패라고 정의해버린 과거를 때로는 사다리의 맨 밑으로 바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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