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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Sep 29. 2020

나의 시작에게 - 4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하고, 처음으로 미워한 사람






사실 전화를 끊고 곧바로 침착하고 씩씩하고 해맑게 내가 갑자기 왜 그랬지? 엄마에게 부정적인 감정들을 보려 하지 않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게 됐을까 짚어볼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전화를 끊은 직후에는 엄마가 너무너무 미웠다. 엄마에게 화내고 싶었지만 말하지 못했던 장면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집에 있고 싶지가 않아서 카페로 갔다. 창가에 앉아서 차가운 바깥공기와는 다르게 따스하게 빛나는 오후 햇살을 받으면서 일기장에 온갖 원망을 쏟아냈다. 그렇게 감정이 터져 나와도 여전히 내 속에서 튀어나오려는 말들을 붙잡는 ‘이제 와서 그런 얘기해서 뭐하게?’ 때문에 다 말하지 못했던 응어리들을 일기장에 줄줄 썼다. 종이에 눈물 떨어지는 소리가 톡톡 났다. 


그러는 와중에도 줄줄 쓰는 글마다 따라붙는 소리가 있었다. 그건 아마도 내가 일기장에 쓴 말들을 실제로 엄마에게 하면 이렇게 말할 거라는 가상의 엄마가 하는 잔소리였을 것이다. 일기에 쓴 내용의 반의반도 전화로 말하지 못했지만 실제의 엄마는 내가 상상한 가상의 엄마처럼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안에는 어리광 부리고 싶고, 엄마에게 전부 책임을 돌리고 싶은 아이와 늘 엄하게 혼내는 내가 만들어 놓은 가상의 엄마가 있었다. 그건 당연히 진짜 엄마가 아니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가상의 엄마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 아이가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내려하면 혼내고 묵살해버렸던 것 같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아이의 존재 자체를 잊고 성숙한 어른인 양 잘 사는 척했지만 그 애는 미처 알지 못한 사이 엄청난 원망과 서러움을 먹고 거대해져 있었다. 


그 애가 곧 나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도대체 어떻게 진정하게 만들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한 동안 내버려 뒀다. 따라붙는 가상의 엄마가 하는 잔소리 같은 건 무시하고, 엄청 자주 하지도 않으면서 의무감에 가깝게 하던 안부 전화도 하지 않고 그 전에는 관심도 없었던 엄마랑 싸웠다거나 엄마 때문에 힘들다는 인터넷에 올라오는 글들을 일부러 찾아서 읽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엄마가 밉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고 나니 친구들이 엄마와 싸웠다거나 엄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가끔 얘기하면 내가 했던 나와서 살면 해결된다거나, 엄마도 타인이니까 너무 막 대하면 안 된다거나 나중에 후회하는 게 싫어서 참는다고 했던 말들이 가소롭게 느껴졌다. 진짜 내 속마음은 알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얘기했다는 게 우스웠다. 



얼마 간 혼자서 엄마가 미웠던 순간들을 잔뜩 떠올렸다. 일기로도 종종 썼다. 대학생 때부터 최근까지 문득문득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었다. 휴학하겠다고 했을 때 엄마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하냐고 화를 내던 장면, 엄마에게 뿌듯한 마음으로 용돈을 줬는데 고맙다는 말 대신 할머니도 잘 챙겨드리라고 말하던 장면 등등. 어쩌면 시간이 이렇게 흐른 뒤가 아니라 그 직후에 엄마에 대해 글을 썼다면 미움의 순간들을 아주 긴 글로 썼을지도 모른다. 그러는 동안에도 엄마는 아마 몰랐을 것이다. 원래부터도 그렇게 살갑지는 못했던 딸이었으니까. 미움을 계속 곱씹다 보니 이 미움이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커졌는지 언제까지 그 애가 난리를 치려는 건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내가 미워하는 엄마가 아닌 사랑하는 엄마의 모습들이 겹쳐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분명 엄마를 사랑한다. 아기였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런데 왜 갑자기 엄마가 그렇게도 미워진 걸까?


 몇 년 전 호기심에 봤던 점집에서 들었던 얘기 중에 오래 기억하고 있던 말이 있었다. 무당이 가족들의 길흉화복도 봐주겠다고 해서 엄마의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 이야기들이 그렇듯 다 까먹었지만 딱 하나 기억하고 있는 문장이 있었다. 무당은 3년만 지나면 엄마의 생은 편할 것이라 했다. 지금 고민하고 있는 일들이 다 해결될 것이라고. 그 말을 듣고 어이없게도 자연스럽게 3년 지나면 내 인생도 편하겠구나.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했다. 엄마의 걱정이 내 걱정이고 내 고민이 엄마의 고민이니까 그러지 않을까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말을 부적마냥 계속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의 생이 편한 것과 내 인생이 편한 건 정확히 같은 의미일 수는 없는데 그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히려 어릴 때보다 더 엄마와 나를 감정적으로 엮어서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 속을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그러지 못해 서운한 마음이 미움으로 바뀐 게 아닐까 싶었다. 처음에는 분명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알리지 않기를 선택했던 것이었는데 습관이 되고 선택할 수도 없이 말할 수 없는 지경까지 와서 엄마를 미워하고 있는 그것조차도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서럽게 울면서도 끝내 말하지 못했던 걸 보면 이제 영원히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계속 괜찮은 척, 평온한 일상만 전달하다 내가 정말 감정적으로 도움을 청해야 할 순간이 왔을 때 엄마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을까? 그리고 꼭 그런 순간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계속 시간이 흐르면 엄마가 알고 있는 나와 실제의 나의 간극이 너무 커지지 않을까? 생각의 흐름이 거기까지 갔을 때 그토록 강렬했던 미움 같은 건 신기루처럼 다 흩어지고 그 자리에 대신 아득한 감정만 들어찼다. 휑한 절벽 끝 아주 가까이에 가고 있는 그런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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