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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Nov 1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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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장 정리를 하며




옷장 정리를 했습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하는 일인데도 언제나 옷의 양은 줄어들지 않네요. 옷장을 열어 구석에 박혀 있던 옷들까지 헤집어 꺼냈습니다. 옷장 안으로 머리를 숙여 팔을 깊숙이 넣어 옷들을 안는 순간 예전에는 익숙했지만 지금은 설어진 향기가 얼핏 느껴졌습니다. 옷들 사이에 향기가 끼어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 찰나 어젯밤 꿈에 그가 나왔다는 게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꿈에서조차도 나는 그가 어렵고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살짝 깨어서는 잠결에도 꿈에서도 잘 될 수 없구나 생각했었죠. 하루 걸러 하루 그가 꿈에 나오던 때도 있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도 그 꿈들이 생생해 되짚고 되짚으며 왜 자꾸 꿈을 꾸는 걸까 온갖 의미부여를 하던 날들.


이제 보니 이건 마지막 인사 같은 그런 건가 봅니다. 떠올리고 생각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드니 뇌에서 마지막 확인 절차를 밟는 중인가 싶어요. 정말 삭제하시겠습니까? 한 번 더 물어보는 것. 너에게 이러한 사람이었는데 요새 자주 떠올리지 않네. 잊어버려도 되겠니? 물어보는 것. 매번 아니오 라고 답했지만 이제 내 머릿속에서도 안녕을 말해야 할 때가 왔나 봅니다.     



꺼내 놓은 옷들을 하나씩 봅니다. 못 입을 걸 알면서도 버리지 못한 옷들 때문에 옷의 양이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나 봐요.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옷을 하나하나 살펴보고는 그대로 옷장에 다시 넣었네요. 꿈들, 기억들은 못 입게 된 옷 마냥 아까웠습니다. 이리 보고 저리보고 다시 입을 것 같기도 하고. 이제는 알아요. 비울 때가 되었다는 것. 그 품에서 떠날 때는 허전하고 서운하고 시렸지만 머리에서 떠날 때는 아깝네요. 못 입게 된 옷을 버리는 것처럼. 못 입는다는 걸 분명히 알기 때문에 버려야 한다는 걸 알지만 거기에 배어 있는 추억들을 함께 버리는 것 같아 아까웠어요. 같이 한 시간은 물론 혼자 다짐하고 가정하고 연습했던 시간까지. 그 옷이 왜 지금껏 옷장에 들어 있었나. 이렇게 하면 입을 수 있을까. 저렇게 하면 입을 수 있을까. 온갖 궁리를  했으니까. 꿈에서도 긍정적인 모의실험에 실패한 나는 그냥 씁쓸하게 웃으며 옷들을 정리했습니다. 이제 정말 입지 않던 옷들을 버려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미련과 추억들이 배어 있는 옷들을 개어 담으며 한 사람을 사랑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잊어내는데 걸리는 시간은 절대로 비례하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오히려 반비례하는 것 같기도 해요. 미처 다 주지 못한 마음을 들고 지고 돌아오는 길은 너무도 멀게 느껴졌습니다. 가져간 마음을 다 주고 홀가분하게 돌아오는 사람과 다 주지 못하고 무겁게 들고서 미적대며 돌아오는 사람의 발걸음이 어찌 같을까요. 돌아오는 길에 했던 시뮬레이션이 그와 만난 시간의 수 만 배는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황망하게 돌아와 구석에 놓아둔 시간이 꽤 길었습니다. 버리려고 꺼냈다 다시 개어 서랍에 넣어 두기를 반복하며 다시 추억했고 반성했고 미련했습니다. 



영영 그 짐들이 내 속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것 같았습니다. 시간은 꾸준히 흐르고 어느덧 뒤를 돌아보니 그 무겁던 추억도, 미련도 조금씩 시간에 닳아 흩어지고 없었습니다. 옷들은 추억의 무게를 어느새 흩어 내고 조금씩 가벼워져 있었어요. 버릴 옷들을 차곡차곡 담아 넣으며 가벼워진 옷장만큼 그도 행복하기를 바랐습니다. 어쩌면 내가 돌아오는 길이 힘들었을 때, 마음의 짐들이 어지러이 버거웠을 때 그를 원망했을지도 모르니. 그 원망들도 미련과 함께 다 흩어졌으니 그러니 가볍게 그도 가볍게 시간의 짐을 지지 않고 잘 살기를 바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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