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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아리 Dec 18. 2020

그 날, 해녀에게 배운 '숨'의 의미

종달리 최고령 해녀 89세 권영희 할머니가 이야기 한 '숨'의 의미

지난 제주도 여행에서 '해녀의 부엌'에 갔다. '해녀의 부엌'은 제주도 해녀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해녀 한 명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을 시작으로 해녀분들이 해산물들의 특징과 숨은 이야기를 소개해주고 직접 만들어주신 요리를 먹으며 일생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이 프로그램을 통해 제주도는 육지와 다르게 여자가 중심이 되어 집안의 경제를 이끄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해녀들은 10살 무렵 물질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기 교육이라 해서 특별한 방법 같은 건 없었다.


"숨 조금 남아 있을 때 올라와야 돼."


80년 가까이 물질을 한 89세 권영희 할머니는 배운게 이 한 마디밖에 없다고 했다. 권영희 할머니의 어머니는 '숨 조금 남았을 때를 놓쳐' 돌아가셨다. 나는 그 말이 굉장히 상징적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끼면서도 내 인생에서 숨을 남긴다는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 했다.




'해녀의 부엌' 기억이 어렴풋해질 쯤 클라이밍을 시작했다. 클라이밍은 홀드(돌) 네 개에 의지해 위로, 혹은 옆으로 나아가는 운동이다. 클라이밍을 할 때는 딱 두 가지만 있다. 정상과 추락. 안간힘을 다해 매달려 있다보면 그 두 가지는 살거나 죽거나 하는 정도의 극단적인 상태와 맞닿는다. 그 때는 '정상'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보다 '추락'을 죽음에 대입하면서 오도 가도 못하고 가만히 매달려 있게 된다. 무서운 마음에 결국 한 발 한 발 올랐던 길을 다시 내려와 바닥에 발을 딛고 서면 이상하게도 '다시 해볼게요!'라는 말이 습관처럼 나왔다. 땅에 두 발을 디디면 추락이 발끝에 닿던 공포를 쉽게 잊어버리곤 했다.


덕분에 한 가지 길을 10번, 20번 넘게 오르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나의 '한계'다. 같은 길을 오르다보면 반복해서 포기했던 지점이 더 이상 떨어질 것이라는 공포나 추락이 아닌 '한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이후부터는 이 한계에서 한 발 더 나아가야 이 길을 완등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전환된다. 이제 클라이밍을 한 지 2달이 되니 그냥 홀드만 잡고 밟아 나아가면 될 것 같았던 클라이밍 길이 한계를 밟고 정상을 향하는 길이라 생각 된다. 남들보다는 많이 느리지만 이제 내 걸음도 '정상'을 향해 가게 되었다.




"할머니~저는 물 속에 10초만 있어도 숨이 막혀 무서운데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물 속을 헤엄칠 수 있나요? 비결이 뭔가요?"


'해녀의 부엌'에서 누군가 할머니에게 이런 질문을 했고 할머니는 이렇게 답했다.


"비결 같은거 없어~내가 여기서 죽겠다 하면 올라오는거야."


할머니도 물질을 시작한 10살 때부터 숨을 오래 참진 못 했을거다. 그렇다고 숨을 오래 참는 법을 알려준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물속에서 집안의 살림을 책임질만큼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숨 막히는 물 속과 물 밖의 세상을 몇 십 번을 반복하며 알게 된 '한계' 때문일 것이다. 두려움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날 두려움 너머의 나의 한계를 알게 된다.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두려움을 이기고 한계에 부딪쳐 볼 힘이 생긴다. 어머니가 물 속에서 돌아가셨음에도 또 80년을 넘게 물 속을 헤엄쳤던 권영희 할머니처럼.


내게는 여러가지 꿈이 있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PD, 작가, 평범한 사람, 부자, 여행가 등. 지금도 여러가지가 있다. 제주도 사람, 책방 주인, 일을 안 하는데 자기 분야에서 유명한 사람, 친구들 중에 제일 돈 잘 버는 사람, 어디 가서 지지 않는 사람 등 추상적이지만 많은 이상을 바라보며 하루 하루를 나아가고 있다. 내 소소하지만 거대한 꿈은 태생부터 나보다 돈이 많은 친구에게 한 번 주저앉고, 자기 의견을 잘 내세우는 사람에게 주저 앉고, 제주도에 살면서 책방도 하고 일도 많이 안 하는 것 같은데 유명한 사람에게 주저앉는다. 주저 앉아 드는 부러운 마음은 곧 자격지심이 되고 나를 움츠러 들게 했다.


"숨 조금 남아 있을 때 올라와야 돼."


그러나 이제야 그 의미를 알겠다.


"그래야 다시 들어갈 수 있어."


권영희 할머니의 어머니는 이 말씀도 하시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다시 부딪쳐 보는 것. 어차피 내 걸음은 어딜가든 이상과 두려움이 함께할 것이다. 그러니 다음을 위해서 조금 덜 상처받고 또 나아갈 줄 아는 것. 부러움과 두려움, 자격지심 같은 것들 별 것 아니라고 억지로라도 생각하면서 그 너머의 이상을 바라 볼 줄 아는 것. 내게 '숨'은 그런 의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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