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가을이었다. 고려대로 진학한 친구들이 많았던 탓에 난 자주 안암동으로 놀러 갔고, 그날도 6호선에 몸을 실었다. 그날 밤 인촌 동상이 있던 인문 캠퍼스 정문 잔디밭에선 고려대 총학생회가 주최한 조국 규탄집회가 열렸다. “명문대생들도 비판한다”라는 식으로 언론에 보도되고 있던 터라 구경할 겸 들렀다. 하지만 공사하고 있던 SK미래관 옆을 지나 정문 잔디밭으로 들어섰을 땐 내가 생각했던 풍경과는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집회 참가자 규모보다 취재 온 언론사 인원과 차량, 카메라가 더 많았다. 알아보니 집회 초기에는 동참하는 학생들도 많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수는 줄어들었고, 취재 대상보다 취재하는 쪽이 더 많아졌단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우스운 형국이었다. 집회를 이끌던 이들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공정의 가치를 훼손했다고 부르짖었다. 그런데 총학생회장을 비롯해 주최 측 상당수가 과고·외고·자사고 등 특목고 출신이었고, “너네도 조민(조국 딸)과 같은 특기자 전형이나 평범한 사람들은 꿈도 못 꿀 좋은 스펙들 달고 들어왔을 것 아니냐”라는 지적이 쏟아졌다. 총학생회가 집회의 동력을 잃은 것이다. 결국, 부정의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 메신저 또한 공정한 과정을 거쳤음이 담보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공정하다고 평가받는 과정을 거쳐 엘리트가 된 이들은 타인들의 비판으로부터 비교적 어느 정도는 자유로울 수 있는, 이른바 ‘상징 자본’이라고 불리는 까임방지권을 얻는다.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과연 그 과정이 진실로 공정했는지가 의문으로 남는다.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있었던 그 수많은 독립변인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아이비리그라는 엘리트 학군을 형성하고 있는 미국도 마찬가지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저술한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가 이번에는 이 점을 꼬집었다. 그가 쓴 <THE TYRANNY OF MERIT>에서 말이다. 이 책을 직역하면 ‘가치의 역설’ 정도가 된다. 그런데 한국어판 제목은 <공정하다는 착각>이다. 번역을 맡은 함규진 교수가 의역한 것이다. 처음에는 샌델의 주장이 곡해될까 봐 우려했으나 책을 다 읽은 뒤에는 지나친 기우였음을 느꼈다. 오히려 의역된 제목이 이 책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 이 책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비교적 풍요로운 엘리트 계층의 승자들이 능력주의를 바탕으로 상징 자본을 취득하여 정당성을 무기로 계층적 비판을 무마하고 패배자들의 굴욕감을 당연시하게 한다.” 정도다. 여기서 승자와 패자는 세속적 영달이나 사회적 성공, 금전 축적의 정도를 뜻한다. 샌델의 주장에 반대하는 견해도 없진 않다. 경쟁의 승자가 반드시 엘리트 계층의 전유물인지(개천에서 승천한 가재, 붕어, 게는 없는지), 능력주의보다 더 공정한 제도가 있는지(능력주의가 최선이 아니라 차악이라는 것.)도 논쟁해 보아야 한다. 하지만 우선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샌델의 논리를 이해하려면 능력주의 신화의 서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이야기는 2차 대전이 끝난 현대부터 시작한다. 그즈음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은 사립학교 중심·동문 자녀·부자들의 세습이 낭자했다. 하버드대 총장이었던 제임스 브라이언트 코넌트는 이런 현상을 없애려고 ‘능력주의 쿠데타’를 기획했다. 바로 SAT·내신 등 시험과 평가로 입학하는 학생들의 비율을 늘리는 것이다. 계층의 고착화를 탈피하고 유동성을 담보하려는 조치였다. 가난한 집 자식도 노력하고 공부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아메리칸드림의 회복이기도 했다. 출발은 좋았다. 하지만 코넌트의 의도와는 달리 그 능력도 결국엔 세습되기 시작했다. 더 정확히는 ‘능력’이라고 정의하는 능력주의 지표·평가 성적이 세습되기 시작했다. 미국만의 일은 아니었다. 영국, 유럽 등 전 세계가 능력주의 열풍으로 뒤덮였고, 정치의 영역에선 진보와 보수 가릴 것 없이 나타났다. 특히 제3의 길을 표방했던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와 보수당의 대처, 미국 민주당 등이 능력주의를 부르짖었고 오바마 행정부 시절 절정을 이루며 지금껏 이어오고 있다. 예측과 달리 능력주의는 빈자와 서민들에게 삶을 살아갈 희망을, 동력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이 가난한 이유를, 부자들이 부자인 이유를 정당화하는 기득권의 논리로 작용했다. 능력주의가 가난을 정당화한 것이다. 마치 자본주의 초창기 시절처럼. 당연히 백인 저소득 계층은 분노했고, 반항의 아이콘인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했다.
과거 엘리트층이 대놓고 세습하던 시절에는 저소득층에도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고 오히려 그들보다 더 뛰어날 수도 있다는 ‘상징자본’마저 빼앗지는 못했다. 그런데 능력주의는 달랐다. 소득 구간에 따라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를 둘러싼 배경에 의해 도태된 이들은 책임도 스스로 져야 한다고 정당화했다. 즉, 능력주의가 ‘공정해 보이는’ 틀을 통해 상징자본마저 빼앗고 희망을 박탈한 것이다. 물론 경쟁을 통해 아이비리그 대학에 다니는 부유 계층 사람들도 열심히 노력해서 스스로 갈고닦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능력주의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속도가 좀 늦춰지더라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방향을 바꾸는 일이 중요하다. 샌델은 일정 성적·평가 이상이면 ‘추첨권’을 부여하는 제비뽑기 방식을 제안했다. “높은 지위를 가진 이들이 오만하지 말고 겸손하자” 등 많은 아이디어가 있었지만, 샌델 주장의 골자는 이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학 가능한 역량을 가진 학생을 선별할 수도 있고 대학 서열화 현상을 완화할 수도 있으며, 무엇보다도 상징자본의 독점을 깨부수고 계층 이동의 희망도 드높일 수 있다고 말이다. 상징자본의 파괴를 위해 ‘제비뽑기’라는 우연성을 도입하자는 샌델의 해법이 명확한 처방인지는 모르나, 그의 진단만은 정확한 듯하다. 능력주의에서 담보된 상징자본의 파괴를 통해 답보상태에 놓인 현실을 타개하는 것 말이다.
사족 : 왜 청년들은 ‘공정’을 외치는가
몇 년 전부터 ‘공정’은 시대정신이 되었다. 전국민적, 아니 그래도 나름 산다는 대한민국 청년들 공통의 의견이다. 고도 경제 성장기 이후 개천은 마르고 사다리는 부러졌다. 성장의 과실이 마르면서 사회적 계층의 이동도 줄었다. 희망이 안 보이는 거다. 더 나은 삶을 살 거라는 희망이.
과거 절대적 빈곤의 시대엔 못 살아도 열심히 하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사회로 나가면 안정적으로 취업할 수 있었고 대출을 땅겨 내 집을 장만할 수도 있었다. 정년이 보장된 직장에서 꾸준히 월급을 받아가며 빚을 갚고 노후는 국민연금을 받으며 생활할 수 있었다. 가장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인생 루트였다. 심지어 이자율도 지금보다는 훨씬 높았다. 예금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목돈이 모였다. 지금은 다르다. 불확실성이 미래를 잠식했다. 앞서 언급한 인생 루트는 깨진 지 오래다. ‘내 집 장만’은 하늘의 별 따기가 됐다. 돈을 예금에만 쌓아두면 바보짓이다. 지금 청년들 대부분은 은행 예금보단 주식이나 코인을 한다. 투기가 아니다. 자기방어적 성격이다. 돈을 그대로 두면 가치가 떨어지니 어쩔 수 없다. 이들이 증권이나 금융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단순하다. 살아남으려는 절박함 때문이다.
그사이 취업은 더 어려워졌다. 그나마 있는 일자리도 수도권으로 몰리면서 지방은 말라간다. 지방대학은 설 곳이 없다. 지역거점국립대조차 충원율을 못 채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뉴스에선 ‘지방의 위기’라며 떠들어 대지만 얼마 안 있으면 위기가 아니라 일상이 될 것이다. 작년부터 시작된 코로나19는 끝날 기미가 안 보이고 더욱이 한국은 엘리트 구조가 공고하다. 그 틀을 비집고 들어가기는 매우 어렵다. 양극화가 문제를 넘어 일상이 된 지도 오래됐다.
지금 세상이 이렇다. 그래서 청년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공정’을 외친다. 자리는 부족하고, 사람은 많으니 반칙과 특권 없이 정정당당히 승부라도 해보자는 거다. 패배하여 깨질지언정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