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 방송에서 너 부르는 거 아냐?"
점심시간 방송에서 학생 부장 선생님이 나와 정림이를 불렀다. 우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통은 학생부에서 누군가 부르면 뭔가 사고를 쳐서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같은 여고에서 학생부에서 부른다는 것은 징계를 받을 정도의 큰 일일 경우에 해당되었다. 초조한 마음에 교무실로 향하자,
" 네가 미소야? 네가 정림이고? 여기 꿇어 앉아. 학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말이야. 되지도 않게 다른 학교 남학생들이랑 어울려서 불법 서클이나 만들고 세상 말세야. "
곁에서 정림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나는 화가 나서 학생부장선생님을 노려봤다.
" 공부도 못하는 것들이 말이야. "
잔소리가 일장 이어질 때 문학선생님이
" 어 미소 아니냐. 여긴 웬일이야? 선생님 이 아이들 무슨 잘못이라도..."
" 아 선생님 그게 말이죠. "
" 일단 나가서 이야기하시죠. "
두 분은 그렇게 밖으로 나가서 10여분을 이야기하셨고 잠시 뒤 학생부장선생님과 문학선생님이 들어오셨다.
" 일단 자초지종을 문학선생님께 하나도 빠짐없이 말하고 사유서 적어내. "
학생부장선생님은 그렇게 말하고는 문을 쾅닫고 나가셨다. 그러자, 문학선생님께서,
" 자 정림이는 일단 저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미소는 옆에 상담실로 가자. "
나는 문학 선생님의 뒤를 따라 상담실로 갔다. 그러자 문학선생님께서 자리 앉으시더니,
" 음. 말하기 곤란하면 오늘은 지나고 말해도 되는데... 네가 불법서클을 만들고 할 애는 아닌 걸 아니까. 학생부장선생님께서 오해하신 거 같아. 오늘이 지나면 혹시 그 오해가 더 깊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 저희 그냥 한글 문학동아리에요. 경원시와 장원 시 고교학생 연합동아리요. 저희 학교 선배들도 있었고 다른 학교 선배들도 있는 20년 된 전통 있는 모임요. "
" 음. 그런데 왜 학생부장선생님께서는 그런 오해를 하신 걸까. 혹시 그간 너희 활동에 대해 말해주겠니?"
평소 아빠처럼 다정하신 문학선생님께서는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양손으로 턱을 받친 채 나를 바라보셨고 그간 활동에 양심에 걸릴 만한 게 없었던 나는 우리가 모였던 날부터 시낭송, 주제 발표, 한글 연구, 봉사활동을 한 것 등 그간 활동했던 것들을 담담히 말씀드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의 흐름 한번 끊지 않고 가만히 듣고 계시던 선생님께서는 이윽고 말문을 여셨다.
" 음. 선생님이 듣기에는 취지도 그렇고 활동에서도 이상은 없는 거 같아. 다른 학교에서는 공인된 동아리라고 하니 확인하면 되고 다만 우리 학교에서는 외부동아리 자체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아마도 불법으로 인식된 거 같은데 아무래도 여고다 보니 엄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어. 그러니 그간 활동은 그렇다 치고 이제는 그 동아리 활동은 그만두는 게 나을 것 같아.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 말이야. 안 그렇니. 미소야?"
" 하지만... "
" 그런 활동은 대학에 가면 기회가 많아. 지금은 공부에 집중할 때고 무엇보다 여고생이니 니들 안전문제도 있어서. 계속 활동을 하게 되면 부모님께서도 아셔야 하니까 연락을 해야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렴."
" 알겠습니다. 선생님. 오늘 감사했습니다."
" 그래. 학생부장선생님께는 내가 잘 말씀드리마. 나가면서 정림이도 불러주렴."
그렇게 다시 교무실로 가서 학생부장선생님께 한소리를 듣고 다시는 활동하지 않겠다고 각서를 쓰고 교실로 돌아왔다. 곧이어 정림이 돌아오자 나는 말했다.
" 아 너무해. 유일한 낙이었는데."
" 진짜. 너무해. 어른들은 왜 이렇게 꽉 막힌 거야. 우리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 미소야. 그게. 너한테 내가 말 안 한 게 있어. 사실."
정림은 머뭇거리더니 나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그간의 일들을 이야기해 줬다.
그날 봉사활동을 끝내고 권익이 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내가 나온 뒤 기어이 권익이 집에서 사달이 났다.
권익은 내가 뺏은 술병을 다시 가져와 아이들에게 나눠주었고 술을 끝까지 안 먹는다던 정림과 경윤을 제외하고 다른 아이들이 그 긴 술병의 술을 다 마셨다고 했다. 그리고 그 길로 권익은 그대로 뻗었고 다른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갔는데 문제는 무학여고 아린이었다. 아린이 술에 취해 휘청거리며 집에 들어서며 엉엉 울며 불며 난리를 쳤고 놀란 부모님이 고이 키운 딸아이가 술이 곤드레 만드레 되어 들어오니 놀라신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동아리만 다녀오면 방문을 잠그고 울며 불며 난리를 쳐서 못마땅해했는데 그 길로 교육청에 전화를 걸어서는 난리를 쳤고 교육청에서 현장 조사를 했는데 다른 학교는 등록된 동아리고 그것도 사적인 개인 일탈로 치부되어 얼렁뚱땅 넘어갔는데 문제가 우리 학교에서 터져 버린 것이었다.
정작 그 자리에 없었던 나, 술도 안 먹은 정림은 그냥 그 소속이었다는 이유하나 만으로 그날 일탈행동을 보인 불량학생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억울하기 짝이 없지만 그렇다고 뭐라 변명을 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그 소속은 맞으니까. 하지만 더욱 화가 나는 것은 나를 무시했던 학생부장선생님의 말이었다. 평소 반에서 1,2등을 하던 정림에게는 한마디 야단조차 치지 않았는데 내게는 성적이 바닥이니 예체능은 어쩔 수 없니 하며 온갖 악담을 퍼부었다.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하나 만으로 이렇게 사람의 인성이 무시되고 존재가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 과연 맞나.
학생이라는 이유하나만으로 그렇게 잘못을 한 것인가. 속상한 마음에 집으로 돌아와 며칠을 지내도록 그 말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수업에 들어가면 내내 잠만 잤다. 정말 아무 쓸모없는 인간처럼 느껴져서. 그러다 어느 날,
" 자자 돼지들. 그만 자고 일어나. 인사해야지. "
" 차렷. 경례."
" 다시"
" 차렷. 두리번. 차렷 경례."
" 자자 거기 돼지. 그만 고개 들어봐라. 니들 마음 잘 안다."
평소 3학년에 들어가시던 국어선생님께서 수업에 대강으로 들어오셨다. 그분은 짧은 쇼커트 머리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검은 정장에 붉은 슬리브를 안에 입고 제법 샤프한 눈매와 턱선을 지녔었다.
" 힘들지? 막막하지? 죽겠지?"
" 네."
누구랄 것도 없이 점점 목소리를 키워가며 선생님의 달램에 대답했고 선생님은 말했다.
" 나도 집에 니들 같은 이쁜 돼지새끼들이 있다. 두 마리. 이놈의 돼지 새끼들은 같은 해 태어나가지고 얼마나 꿀꿀 되며 처먹던지."
" 돼지띠예요?"
" 아니 니들보다 한 살 많아."
" 우와."
" 근데 그 돼지들이... 하나는 자퇴를 하고 하나는 대학생이야."
" 우와."
뭔가 남다른 아이들을 둔 어머니. 왠지 돼지라고 부르는 자녀들을 향한 애정이 너무나 사랑스러운 그 마음이 느껴져 우리를 돼지라 부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 우리 집 돼지새끼들은 키울 때는 그리도 많이 처먹어가지고 식비를 축내더니만 하나는 비쩍 곯아서 말라비틀어지고 하나는 좀 사람 되어간다. 인제."
" 근데 샘 왜 저희한테 돼지라 불러요? 우리는 샘 애들도 아니잖아요."
" 왜 아냐? 내 품에 내 울타리 안에 있음 다 귀한 내 새끼인데. 얼마나 이뻐. 포동포동 살이 올라가 날마다 햇빛도 제대로 못 보고 이 교실구석에 처박혀 책만 쳐다봐서 얼굴도 희끄덩하니 떠서 똑같구먼. 안 그래? 이뿐 우리 돼지 새끼들."
" 네. 꿀꿀."
" 까르르르"
" 봐 웃으니 얼마나 이뻐. 내가 이 맛에 학교 오는 거 아니가. "
" 어느 집에서 왔고 어느 부모가 나아 보냈는지 모르지만 다들 이 땅에 태어난 귀하신 몸들이니.
니들 스스로 아끼고 사랑해야 해. 그래야 어디를 가도 사랑받고 존중받지. 적어도 이 학교라는 울타리 아니 집구석에 들어온 이상은 니들은 내 이쁜 새끼들이고 여기 계신 모든 선생님의 자녀들이니 그동안 멋진 미래를 꿈꾸고 행복한 미래만 그리면 되는 거야.
뭐 하러 이 좋은 시절을 안타깝게 보내. 견디다 견디다 힘들어서 이 울타리라도 벗어나고 싶어지면 적어도 계획은 가지고 응? 니들 꿈을 이룰 계획과 그 꿈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믿음은 가지고 뛰쳐나가. 그래야 세상에서 살아남는다. 알았나?"
" 네."
구구절절. 공부하라는 백 마디 말보다 학생의 본분에 대한 어떤 말보다 더 귀에 와닿는 말들.
선생님은 그렇게 시작한 말들로 어떻게 우리가 고3을 준비하고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이며 계획은 어떻게 세우며 잡생각은 어떻게 없애는지 마치 지금 고3인 된 듯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가며 설명해 주셨다. 마치 막힌 속이 뻥 뚫린 듯 칠흑 같은 암흑이 걷히고 조금이나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미래가 보이는 순간이었다.